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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Nov 12. 2018

우물과 선인장

우물집은 할머니가 자식 여섯을 출가시킨 후 혼자 살던 집이다. 녹이 슨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농기구를 넣어둔 창고와 재래식 화장실, 개들을 넣어둔 뜬장이 있었다. 정면으로는 담장을 따라 선인장 화분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고, 오른쪽으로 우물과 평상, 스테인리스 문이 달린 작은 집이 있는 구조였다.


우물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속이 잘 보이지 않고 항상 축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이 그랬던 것은 당연하지만, 어릴 땐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다. 물을 길으라고 시키면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졌다. 우물 속으로 던진 두레박이 물에 잠기면, 줄을 잡고 있던 나도 두레박과 함께 삼켜져 버릴 것 같은 기분 나쁜 '꿀렁' 소리가 났다. 게다가 가끔 우물 벽을 타고 청개구리들이 올라와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통에 나에게만 주어지는 우물에서 물을 깃는 미션이 나는 늘 불만이었다. 우물을 쌓아둔 돌도 그리 높지가 않아서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꼭 빨려 들어가서 영원히 잠겨버릴 듯했는데, 돌이켜보니 한마디로 나는 우물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던 것 같다. 그런 우물이 있는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내게는 딱 우물 같은 존재였다. 어딘가 기분 나쁘게 어둡고, 무슨 꿍꿍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또 하나, 그 집에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선인장 화분들이 있었다. 지금에야 선인장이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소재로 쓰이는 세련된 식물이지만 그때는 그냥 이상하고 기분 나쁜 화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 거무튀튀하고 괴상한 모양새들을 보고 있자면, 선인장 가득한 그 마당이 참 할머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인장에 잔뜩 돋아있는 가시들이 마치 그녀의 양볼 가득히 들어찬 용심 같았다. 도무지 예쁜 구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해야 할까. 단 한 번도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던 그 집도, 그 집에 사는 할머니도 나에겐 늘 가시를 잔뜩 세운 선인장처럼 매몰찬 존재들이었다.



엄마는 임신이 어려웠다고 했다. 몇 번의 유산을 겪고 힘들게 낳은 첫 아이는 딸이었다.
시댁도 남편도 아들을 원하니 또 낳아야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엄마는 그때의 기억은 좋았던 것이 거의 없어서 그냥 다 잊어버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먼 친척 어르신이 꾸어 잘 기억도 나지가 않는다던 태몽도 남자아이. 아들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 엄마는 이번엔 꼭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하지만 배가 불러오고,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 아닌 것을 알게 되자 그녀에겐 여전히 너무나 소중한 작은 생명이 다른 이들에겐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아졌다.
그렇게 나는 축하 없이 태어난 그녀의 두 번째 아기가 되었다. 기쁨의 순간에 그녀는 홀로 있었다.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병원에서 그녀는 홀로 그 작은 뜨거움을 안고 기쁨과 후회와 걱정이 뒤섞인 눈물을 쏟아내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제대로 몸을 풀지 못했고, 아이의 이름은 아이를 낳던 날에도 들여다보지 않은 남편이 옥편을 뒤적여 대강 지었다. 그래도 엄마는 그 이름이 참 예뻤다고 했다.

유난히 하얗고 작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보드라운 손가락을 잡으면, 알 수 없는 용기 비슷한 것이 생겨나 가슴을 뜨겁게 했다고 했다. 다시 하루를 버텨낼 기운 같은 것이 슬금 차올랐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엄마와 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원치 않았던 여자애를 또 낳았고, 하는 일 없이 당신 아들이 힘들게 벌어다 주는 돈을 축내기만 하는 쓸모없는 것들이라 여겼다. 
내가 10살 때였나, 엄마와 나는 집에서 쫓겨났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녀에겐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부정에 가까웠으니 심사가 뒤틀리면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 하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들에게 잔뜩 고자질을 했고, 퇴근 후 또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쳤다. 빌지 않으면, 죽도록 맞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것도, 하지도 않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만 맞고 싶어서 그가 지시한 대로 우물집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니년들 아니었으면 내 아들은 벌쓰로 새장가를 들어도 열두 번은 더 들었을끼다! 내 아들 앞길 가로막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기집년들! 다 나가 죽어뿌라! 꼬라지 보기 싫다!"


엄마와 나는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있는 논두렁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엄마손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내가 놓아버리면 다시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더 힘을 주어 손을 잡았고, 엄마도 그랬다. 그날의 일렁이던 들녘을 기억한다. 차갑지 않은 가을바람, 해 질 녘 붉게 물든 황금빛의 논과 밭, 노을만큼 붉었던 뺨과 부어오른 눈두덩이, 힘이 들어간 손가락 같은 것이 나는 잘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홀로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워냈고, 그중에서도 가방끈이 가장 긴 장남이 데려온 고졸의 읍내 아가씨가 그녀에게는 영 탐탁지가 않았다.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읍내의 작은 회사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고,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농협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입행원이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농협이 가장 큰 금융권이니 할머니는 농협에 취직한 아들 덕에 콧대를 엄청나게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도시에서 대학까지 나온 대단한 내 아들에게 경리 일이나 보는 여자애가 들러붙었다 여겨지니 어쩌면 배알이 꼴려도 단단히 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외갓집은 읍내에서 가든식당을 크게 하고 있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사모님 소리를 듣는 외할머니를 보면 촌에서 농사나 지으며 사는 자신과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니 오히려 그런 집의 셋째 딸을 며느리로 들인다는 것에 묘한 희열과 거부가 뒤엉켰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고,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시험이라도 하듯이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시누이 행세를 톡톡히 하는 딸들까지 등에 업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고부갈등이 아닌 일방적인 괴롭힘에 가까웠지만 그는 그 갈등의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고, 폭력으로 자신을 과시했다. 그는 들꽃같이 곱고 예쁘던, 한때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무참히도 망가뜨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폭력적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펜스 안에 던져진 다리가 잘린 양이된 기분이었다. 거칠게 물어뜯겨 빨리 숨통이 끊어지는 것 말고는 어떠한 선택권도 없는 존재. 오랜 시간 꾸준히 부정당하고 세뇌된 우리의 의미를 그들이 말하는 데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우리는 각자 흩어져 살게 되었다. 도로개발로 우물집은 허물어졌고, 엄마도 나도 각자의 인생을 꾸리며 괜찮은 척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젠가 소리 나지 않는 총이 생기면 자기가 제일 먼저 사버리겠다며, 그들을 모두 쏴 죽이고 자기도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웃으며 넘겼지만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인이 박혔으면 다 끝나고서도 저런 말을 할까 싶어 마음이 무척이나 쓰렸다.


엄마의 학창 시절과 아가씨 때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곱고 맑았다. 하지만 너무나 예쁘게 웃고 있는 스물다섯의 아가씨로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너무 먼 곳으로 가버린 엄마가 우물도 선인장도 없고, 어떠한 괴로움도 없는 곳에서 오직 웃음이 많던 예쁜 숙녀가 되어있길 바라본다.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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