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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11. 2020

프레셔스



*영화 스포일러가 조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낮이 바뀐 생활패턴 덕에 매일 밤마다 한 두 편의 영화를 보게 된 요즘. 스치듯 본 적 있는 스틸컷에 끌려 늦은 밤 영화 '프레셔스'를 재생시켰다.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흑인 소녀는 대안학교에서 참스승을 만나 조금씩 변화한다. 마약에 찌든 채 그릇된 자격지심으로 딸을 미워하는 엄마와 자신을 성적 노리개로 삼은 계부 사이에서 프레셔스는 사랑이 내게 해 준 것은 나를 때리고 겁탈하고 몹쓸 병에 걸리게 한 것이 전부라며 울부짖는다. 어린 나이에 임신한 첫째 아이를 빼앗기듯 입양 보내고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된 프레셔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프레셔스는 글을 배우고, 일기를 쓰고, 올바른 어른들에게서 조건이 없는 사랑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 프레셔스처럼 내 상황이 극단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시기가 지나고 나니 옛 생각을 하다 보면 눈물보다는 조금 깊은 한숨이 저 아래에서부터 조용히 밀려 나온다. 이제 나는 내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할 필요가 없는 나이와 인간관계들 속에서 살고 있고, 내 입으로 다시 그런 이야기들을 할 일은 없을 거라 착각하며 살았다. 인생에 새로운 사람이 잘 등장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누군가 등장해도 이런 이야기는 서로에게 투머치 인포메이션이 될게 뻔하니 애초에 나는 꺼낼 생각도, 상대는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정도의 관계가 서로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흔히 말하는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며 각자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을 터득 중인 셈이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간혹 등장해서 나를 휘저어 놓는다. 그러면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저런 걸 좋아해. 또 요런 것도 좋아하고... 하며 내가 좋아하는 온갖 것들을 떠들어댔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는 속마음을 숨기고서. 간혹 어떤 이의 눈은 나를 꿰뚫으려 하고, 그러면 나는 그 눈빛이 두려워 입꼬리를 올리며 더 많이 웃고 목소리를 높이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좋아해'하며 신이 난 척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누군가는 그런 것 말고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동공지진이다.


 매일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중심이 없이 빙빙 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큰 소리를 싫어하고, 싸움이 날 것 같은 긴장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술이 많이 취한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고해성사하듯 순순히 옛 일들을 말한다. 나는 우리 사이에 이런 무거운 이야깃거리를 펼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뉘앙스를 슬쩍 풍겨보며,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을 애써 피하며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상대와 나 사이에 무엇이 더 생겨났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측은지심이나 동정을 바란다면 그저 조용히 내 통장잔고를 보여주는 것이 조금 더 빠를 것이다. 실제로 무언가를 바라고 상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만큼이나 나이가 많은데도 이룬 것이 별로 없고, 가본 곳도 별로 없으며, 심지어 지금은 직업도 없는 내게. 심상치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애매한 과거를 테이블 위에 엉망진창으로 풀어헤친 내게. 동정이 아닌 어떤 찐득한 마음을 품는 것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이제는 꽤나 부담스러워진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다.

 

 상대는 무언가 나를 위로해야 할 것만 같은 어떤 얇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적당한 할 말을 찾으려 갈 곳을 잃은 시선으로 천장을 더듬거나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마음이 좀 가라앉아 있는 시기에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상대가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뜬금없이 얄궂은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었다. 사실 성별을 막론하고 이런 쭈글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로는 몇 없는 좋았던 일들을 돌려막기 하는 식으로 대화를 하는 게 내 방식이었다. 카드 돌려막기도 아니고 참... 그때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금방 밑천이 드러나는데도 나는 약간 나도 좋았던 일이 남들만큼은 있었던 사람인 척을 하고 싶었었다.


 세상에 얼마나 힘들게 산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는 늘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제일 힘들었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괴로워했던 시절이 있다. 가장 나쁜 자기 위로는 남의 불행에 빗대어 상대적으로 내가 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이것 말고 더 직관적으로 '그래 이 정도면 살만한 거야'로 마음을 빠르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나는 찾지 못했다. 그런 괴로운 마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바로 떠올리지 못하면 울었다. 왜 우냐고 물으면 그냥 눈물이 나서 운다고 대답했다. 좀 뜬금이 없기도 하지만, 지난날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울음에 당황했을 옛사람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해 본다.


 식상하다고 표현하면 좀 예의가 없을까. 그들의 위로가 소중해지지 못하는 느낌일까. 아무튼 일반적 범주에 드는 보편적 위로들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여지없이 더 깊은 우울에 빠져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방식의 위로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옅은 우울에 빠져 냅킨에 눈물을 한두 방울 찍었는데 갑자기 상대가 엉엉 우는 것이다. 매번 위로를 받고 심지어 그간 받았던 위로들의 등급까지 매겨보려던 내게 나보다 더 울어버리는 방식의 위로는 뭔가 뭐랄까. 새롭다. 너무 새로워서 당황하다가 웃었다. 내가 웃으니 울음을 그치는 사람이라니.


왜 울어? 네가 울어서. 내가 우는데 네가 왜 우냐고. 아니 네가 우니까. 아니 그니까 내가 우는데 네가 왜 더 크게 우냐고ㅋㅋㅋㅋ. 아니 네가 우니까ㅋㅋㅋㅋ. 이거 무슨 바보 같은 대화죠....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어떤 고차원의 위로나 옛날의 나쁜 것들을 덮어줄 다른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세상에 나보다 더 큰소리로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몇 명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기대와 함께.



 

 내게 늘 좋은 것을 주려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해 도망만 다니던 시기에도 늘 나의 기저에 깔린 마음은 내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편이 되어줄 것처럼 단것만 주던 사람들에게서도 메워지지 않는 작은 구멍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내 멋대로 흘려보낸다는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했다. 정성을 쏟는데도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만 치고 점점 더 바보 같아지니 그들 입장에서는 꽤나 허무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진짜 내 편이 필요했다. 대신 화내 주고 대신 울어줄 사람. 학창 시절 편이 나눠져 싸울 때 나보다 더 큰소리로 화내 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지 않나. 피구를 하다가 모두가 내게 금을 밟았으니까 나가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울 때, 내가 금을 밟지 않았다는 걸 자신은 봤다고 큰 소리로 말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내 결백이 증명되듯이, 피구 하다가 죽는 것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진짜 중요한 건 내 결백을 믿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때 죽는 것과 우르르 몰려와 떠밀리듯 죽는 건 너무 다르니까.


영화 우리들




 며칠 전 브런치를 둘러보다 '때려 부수는 아버지와 목소리가 큰 어머니'에 관한 글을 읽었다. 제목이 우리 집이랑 비슷하네 하면서. 이유를 막론하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크고 신경질적인 어머니도 응당 자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없는 내 삶은 어쩐지 전폭적 내 편이 없어진 기분에서 헤어 나오기가 참 어렵다. 살면서 내 편이 있고 없고가 너무 중요해지는 어떤 순간들을 거칠 때마다 실제로는 그다지 내 편이 아니었던 그들을 생각을 하게 된다. 대신 화를 내주고 더 큰소리로 울어줘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내 편들. 늘 내게 가장 큰 울음을 선사했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존재하지 않으니 비비고 말고 할 선택지마저 없어진 내 편들을 나는 오랜 시간 미워하면서 그리워했다. 


 언제나 내 편이 되겠다는 사람의 진심 혹은 속임수가 나를 흔든다. 행복하냐는 조금 허황된 질문을 너무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웃을 때 같이 웃고 내가 울면 기꺼이 나보다 더 서럽게 울어주는 사람에게 당분간은 조금 속아보는 것도 괜찮을까. 그냥 즐거우면 웃고 힘이 들면 조금 기대 보는 보편적 마음을. 기대를. 이 하 수상한 계절의 끝에 아주 슬쩍만 걸어볼까.



Coldplay - Daddy

https://youtu.be/OWhiCkEY-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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