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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31. 2018

나의 진심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나에겐 여름 막바지가 되면 찾아 듣는 노래가 있다. 밴드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몇 해 전 나의 여름이 꼭 그랬다. 뜨거운 여름이 끝나고 나니 남은 내 모습은 정말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평소에도 그리 높지 않은 내 자존감이 아주 바닥을 내리쳐 버둥거렸다.
 
 나의 마지막 연애. 사실 연애라고 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즈음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작업실에서 밤샘 작업을 했다. 작업이 끝나면 흐리멍덩하고 너절해진 정신을 깨우러 근처의 카페로 갔다. 늘 창가 자리에 앉아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주로 눈을 감고 통창으로 쏟아지는 강한 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에너지와 카페인을 충전하는 식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눈을 감고 있는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포마드를 발라 매끈하게 넘긴 정돈된 머리. 까만 피부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독특한 차림새. 그는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 가끔 오는데 나를 몇 번 봤다고 했다. 나는 아 그러시구나, 하며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내게서 펜 하나를 빌려갔다.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며칠 뒤 카페에서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여전히 어색하게 대답했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고 명함을 주고받게 되었다. 당시엔 여기저기 명함 주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사실 명함을 주면서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 후, 우리는 자주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가끔 술도 마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며 점차 가까워졌는데, 그럴수록 나는 그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내 강아지를 나 만큼이나 좋아해 주는 그가 싫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진지하게 묻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막 읽기 시작하던 때라 나는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냥 읽어도 좋을 그 대단한 시들을 그와 나란히 앉아 읽으니 시인도, 그도 나에게는 어느새 너무 큰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와 함께 한 뜨거운 여름이 조금씩 힘을 잃어갈 즈음, 돌연 그와 연락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갖 감정들이 끓어올라 요동을 쳤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매일 조금씩 차가워지는 아침 공기처럼 내 마음의 수온주도 조금씩 내려가면서 차분해졌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여름에 그를 남겨두고 다음 계절로 혼자서 걸어갔다.

 낙엽색 스카프를 두르고 작업에 몰두하던 깊은 가을날 그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처음 작업실에 왔던 날처럼 하얗게 웃으며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시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니 너무 많은 말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뒤엉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같이 웃어버렸다.


 이어 코트 깃을 여미는 계절이 돌아왔고, 내 생일을 맞아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생일선물로 뭐가 갖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 '진심'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내가 뱉었지만 어느 누구라도 말을 이어 쉽게 입을 떼기는 어려운 단어였다. 테이블 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지만 이제는 이 관계에 대해 좀 더 성숙한 판단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에 지쳐있었고, 단순히 좋은 마음으로만 사람을 만나기에는 그도 나도 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우리의 발 밑까지 와 있었다. 그 후 몇 번을 더 만났지만, 우리 사이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나는 새해를 맞이하여 결단을 내리고 그의 번호를 지웠다.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얼어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살얼음이 낀 호수에서 쉬지 않고 발을 휘젓는 오리들처럼 내 앞에 놓인 얼음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려 무던히도 발을 휘적거렸다. 새해라는 시기가 주는 용기에 기대 이것저것 일을 벌이며 내 일상에서 그의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바쁘고 고단한 날들을 보내며 그를 완전히 잊었다 생각한 어느 날, 2시가 넘은 밤에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깊게 숨을 내뱉은 뒤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지금 좀 볼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그의 방문을 승낙했고, 조금 뒤 도착했다는 메시지에 현관문을 열자 파리해진 그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때 너무나 좋았던, 늘 궁금했던 그가 내 눈 앞에 서있었지만 나는 이제 그를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
 
 차를 내주고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는 그간 연락을 할 수 없었던 나름의 사연들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에게는 오래 사귄 연인이 있었고, 짧지 않게 만난 두 번째 연인도 있었으며, 그다음이 나였다. 그런데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한편으론 참 재주도 좋구나 싶었다. 얼굴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 모든 사실을 오랜 연인이 알게 되었는데 그녀를 붙잡으려 며칠을 동분서주했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있었다며 멍이 든 손등을 보여주었다. 나는 표정 없이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정말 미안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순간 차가운 그의 발이 내 발을 스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발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날카롭고 건조한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집을 나서 공원 사거리까지 함께 걸었다.


나 : 이제 그만 여기서 헤어지자.
그 : 응 그래, 고마워. 들어가 봐.
나 : 그래 잘 가. 밥 챙겨 먹어.
그 : 응 그럴게. 근데 우리 계속 친구 하자고 하면 내 욕심이지?
나 : 아마도?
그 : 미안해. 내가 밉지?
나 : 이제 미움도 원망도 모두 사라졌어. 아무것도 없어. 나 먼저 갈게.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 아래의 산책로로 내려갔다.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제야 참았던 감정들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빙판으로 변한 산책로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차가운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온몸이 얼어붙고 발에는 감각이 없어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샤워를 했다. 차가운 몸을 녹이는 온수를 맞으며 그간의 여러 감정들을 샤워 거품과 함께 하수구로 모두 흘려보냈다. 그로 인해 쏟아내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일은 사랑도 아니고, 또 사건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접촉사고 같은 것에 내가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를 괴롭혔었다. 지금 또 한 번의 뜨거웠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어쩌면 남아있는 내 모습은 여전히 볼품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노래의 마지막 가삿말처럼 또다시 찾아올 누군가를 위해 고이 남겨둘 것이다. 나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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