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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Feb 07. 2019

당신의 청춘은 어떤 색 인가요?

tell me about it!

청춘. 

靑 푸를 청

春 봄 춘, 움직일 준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①십 대 후반(後半)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人生)의 젊은 나이

②또는, 그 시절(時節)



이제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당연하게 가져다 쓰기에는 어딘가 애매해져 버린 나이 서른셋.

나는 지금 서울에서의 12번째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대구의 한 전문대학에서 조리를 전공했다. 21살이던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학교에 취업계를 내고 일산의 해산물 뷔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 중에는 가장 오래 버텼지만 나는 4개월 만에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고 보니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라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엔 시기가 애매해져 당시 언니가 살던 대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두어 달 쯤을 지내다가 2월 고향의 엄마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졸업식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던 중, 대학 생활 동안 가까이 지내던 친구 B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나 서울에 갈 거야! 처음엔 힘들겠지만 서울에 가야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오, 멋지네! 근데 서울에서 지낼 데는 있나?"

"아니, 우선 직장 근처에 고시원을 잡으려고."

"고시원? 고시원에서 살면서 일을 한다고?

"응,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데. 혹시 너도 갈 마음 있어?"

"서울? 서울은 뭔가... 난 아직 정해진 직장도 없고, 서울에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내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겠어. 생각 좀 해 볼게. 사실 나도 뭐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서울로 가서 자신의 꿈을 키울 거라고 했다. 늘 당당하고 꿈으로 가득하던 B. 그녀가 간다니 괜스레 나도 마음이 동했다. 그날 이후 머릿속에서는 온통 서울이 맴돌았다. 서울에 가서 대단한 요리를 하겠다는 것도, 큰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나도 서울에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서울 서울 서울. 서울로 가야겠다!


"엄마, 내 서울 가야겠다."

"서울? 니 거가 어데라고 가노."

"엄마 내 친구가 카든데 서울 가면 일할 데도 많고, 고시원도 많아서 거기서 지내면서 돈 모으면 월세방은 금방 구할 수 있을 거래. 어차피 내 여기 더 있어봤자 뭐 하는 것도 없다 아이가. 내 한번 가볼게."

"야 니 서울이 얼마나 무서운 덴 줄 알기는 아나! 겁도 많은기 서울 가서 뭐 우얄라 카노."

"게안타. 내 친구랑 둘이서 같이 살기로 했다. 가서 해보고 영 안되면 다시 올게. 그때 뭐하라지만 마라."


서울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자마자 나는 곧바로 B에게 얼마를 준비해야 서울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흡사 먼 나라로 이민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고시원을 미리 알아본 그녀는 우리가 함께 2인실 고시원에서 지낼 경우 한 사람당 27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당시 내 수중에 있던 돈은 40만 원 남짓! '그래, 그럼 차비 빼고 10만 원 정도가 남으니까 가자마자 일을 구하면 한 달 뒤엔 월급으로 두 번째 달 고시원 비를 낼 수 있겠지?' 하는 맹랑한 생각으로 나는 터미널로 가서 덜컥 이틀 후의 서울행 버스표를 사버렸다.


20인치짜리 연보라색 트렁크 하나, 4호 우체국 박스 2개가 서울로 오는 내 짐의 전부였다. 짐은 서울로 출발 하기 전날 미리 받은 고시원 주소로 택배를 부쳤다. 출발 당일, 나는 전 재산 40만 원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고이 품에 안고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이 뒤엉킨 복잡한 기분으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며칠 먼저 서울에 도착해 있던 B가 터미널로 마중을 나와주었고, 나는 그렇게 서울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서울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버스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면접을 보러 이곳저곳 다녀야 하니 버스카드에는 호기롭게 5만 원을 충전했다. 그리고 선불로 한 달치의 고시원 월세 27만 원을 냈다. 이제 남은 돈은 8만 원. 일주일 안에 무조건 직장을 구해야 한다! 나는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마음으로 종일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았다. 구인란에는 티브이에서나 보던 강남, 대학로, 홍대 등 일할 곳이 너무 많아 어디에 지원서를 넣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할 정도였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신입 주방 직원을 뽑는 레스토랑 중 양식, 일식, 한식으로 나눠 각 2군데씩 이력서를 보냈다. 며칠 뒤 스무 살 때부터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한 내 애매모호한 이력서를 귀엽게 봐주신 딱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주방장님과의 면접 후 그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텔 미 어바웃 잇 / tell me about it!


서울에서의 첫 직장, 내가 가장 많은 열정을 쏟았고, 울었고 웃었던 나의 고향 같은 곳이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브런치 붐이 막 일어나기 시작했을 무렵 선두주자처럼 문을 열었다는 그곳은 내가 처음 입사를 했을 때만 해도 브런치를 사 먹으려는 사람들로 매일이 만석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외제차를 타고 가게로 몰려와 우아하게 오믈렛과 칵테일을 사 먹었다. 나는 매일매일 50판 이상의 계란을 깨고 3kg가 넘는 버터를 정제하며 햄튼과 미식가*를 만들어냈다. 학교에서는 말로만 들었던 온갖 종류의 새로운 허브들과 식자재들을 접하며 우물 안 개구리 같던 나의 요리의 폭이나 욕심이 날로 커져갔지만 정작 텔미 어바웃 잇에서 일을 하며 생긴 나의 진짜 꿈은 훌륭한 요리사가 아닌 서른 살 전에 작은 전세방을 구할 만큼의 돈을 모아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하루에 열세 시간, 한 달에 4번을 쉬며 일을 해서 120만 원을 받으면 월세와 차비, 학자금 대출을 제외한 대부분의 돈을 저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텔미 어바웃 잇의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월에 입사한 나의 텔미 어바웃 잇은 11월에 문을 닫았다. 중간에 주방장님이 바뀌었고, 직원들이 떠났고, 내 월급은 두 달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서울에서의 첫 기회를 열어준 나의 진짜 첫 직장인 그곳의 마지막을 꼭 함께 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리감이 발동해 나는 영업이 종료하던 날까지도 텔미 어바웃 잇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주방 직원 3명 중 한 사람으로 남으며 나의 서울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다소 씁쓸한 마무리로 끝이 났다.


나는 40만 원을 들고 서울에 온 나 자신을 언제부턴가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 우스갯소리로는 언젠가 나중에 성공하면 "하혜지 여사의 황금마차" 같은 이름을 붙인 아무도 사서는 보지 않을 듯한 자서전을 펴낸 뒤 인간극장이나 아침마당에 나가서 '맨몸으로 부딪쳐 여기까지 왔노라'라고 으스대겠다며 떠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때의 그 패기가 다 어디로 가버렸나 싶게 사실은 나의 청춘, 20대의 시간을 너무나 쉽게 허비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청춘이 꼭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닌데, 다양한 색깔과 형태로 반짝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는 깨닫지 못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내 청춘의 색이 그저 부끄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더 크게 웃고 음식냄새가 나는 손을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다시 스물한 살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엄마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고향이나 인근 도시에서 적당히 일하며 엄마 곁에 남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혹은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덜 후회스러울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시골에 다니러 갈 때마다 우리 작은딸 서울에서 일한다, 엄청 큰 레스토랑에서 일한다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삶이 버겁고 현실이 갑갑할 때는 내가 늘 선택의 순간마다 어긋난 선택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것이라고 자책을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늘 자랑해 마지않았던 서울에서 일하는 작은 딸,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혼자 힘으로 잘 지내는 작은 딸이 다시 한번 서울에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서른도 아니고, 서른셋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조금 청춘이 된 것 같다. 진심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고, 막연하기만 하던 나의 다음 해 그다음 해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서울에서의 열한 번의 여름과 가을이 지났고, 유난히 눈과 마음이 따가웠던 이번 겨울도 이제는 그 기세가 꺾여 옅어지고 있다. 새벽을 덮으며 조용히 내리는 이 눈이 그치고 나면 이제 곧 열두 번째 봄이 올 것이다. 올해 봄은 어쩐지 조금 더 나만의 색깔로 반짝일 것 같은 기대가 든다. 나의 봄. 나의 청춘이 오고 있다.





*당시 텔미 어바웃 잇에서 판매하던 브런치 메뉴의 이름들

*글에 추가된 사진은 라이언 맥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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