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연의 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Nov 24. 2019

처음 느낌 그대로

우리는 길에서 헤어졌다. 그는 내게서 등을 돌려 걸어갔고, 나도 충동적으로 그와 반대방향으로 스무 걸음 정도를 걸었다. '아, 이건 아니야' 했을 땐 이미 늦었다. 역시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다. 타이밍이라는 게 뭘까.

뒤를 돌았을 땐 이미 그가 없다. 그다지 걸음이 빠르지도 않은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밤새 내가 필터링 없이 쏟아낸 수많은 말들이 그 애의 마음을 할퀴었다. 나도 큰 소리로 울었다. 그 밤에 우리는 서로에게 이미 등을 돌렸다. 나는 그를 등진 채 누워 '아 역시 우리는 안 되겠구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출근 전 함께 밥을 먹기로 했는데 내가 뭘 먹자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고선 뭘 먹을지 자꾸만 되묻는 그가 미워져서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그가 묻는 말에 모두 싫다고만 대답했다.

그깟 미역국이 뭐라고 싶다가도 그래도 생일인데 미역국도 안 챙겨주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어쩌면 미역국은 내 얄팍한 핑계 인지도 모르겠다. 눈치를 보며 내 옆에 따라붙어 걷는 그가 안쓰럽지만 나도 뭔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양손의 짐이 무거웠던 나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는데, 그러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간 적 있던 카페를 조금 못 미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닦아냈고, 그는 들고 있던 내 가방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게 이별을 고했다. 이제 그만하자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그가 내게 등을 돌려 걸어간다. 순간 욱하는 성질이 끌어올라 나도 바리바리 짐을 챙겨 들고 그와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이 무슨 영화 같은 장면인가. 그 와중에 나는 영화 속 은수와 상우의 이별 장면을 떠올렸다. 전혀 영화배우 같지 않은 우리 둘이, 은수와 상우보다 더 영화 같은 너무나 현실감이 없는 이별을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았을 땐 이미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세상이 돈다.


은수와 상우의 첫 번째 이별

 

수많은 그릇된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 내 인생의 또 한 챕터가 생성되었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그와 이별한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알람이 울린다. 데이트 통장이 해지되었다는 메시지다. 이런 확실한 확인사살이라니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그의 메신저 프로필을 보니 함께 찍었던 사진도 사라졌다. 늘 상상했지만 끝을 알 수 없던 완전한 이별이, 비로소 우리에게도 온 것이다.




며칠 뒤 언니와 내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리는 각자의 서글픈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눈물이 터졌다.

내가 먼저, 다음은 언니.

그래도 살아야 하는 건 옆방에서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언니뿐 아니라 어느새 내게도 조금 더 힘을 내서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언니가 핸드폰의 사진첩을 열어보였다. 우리는 그간 아이들이 커온 사진을 함께 말없이 훑어보았다. 정적과 코 먹는 소리가 일정한 가격으로 반복되었고, 사진첩의 끝에 당도해서야 언니는 방으로, 나는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거울 속 빨갛게 부은 코와 눈두덩이가 나를 노려본다. 내가 다 망쳐버렸다는 기분이 나를 집어삼켜, 울지 말자고 다짐을 할 때마다 되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막힌 코를 팽 풀고서는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이제 내 사진첩을 열었다. 심호흡을 하고, 그와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지워 나갔다. 우리는 이제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나와의 반대편으로, 내 마음과는 다른 저 편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이별이란 무얼까 생각해본다. 500여 장의 사진을 정리하고 sns 관계망, 메신저 대화창까지 지우고 나면 이렇게나 금세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린다. 허탈한 마음에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는 게 뭘까' 하고 입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니. 매일 사랑을 말하고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 그런 사이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각자의 한 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몸을 씻으며 마지막으로 그를 떠올리며 딱 한 번만 더 울었다. 이부자리에 엎드려 생일 선물로 받은 두꺼운 책을 시작해보려 첫 장을 펼쳤지만 6일째 논스톱으로 이어지고 있는 노동과 일상의 고단함을 이기지 못해 불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를 나눴을 때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너를 사랑했지만 그러는 동안 내가 사라진 기분이야. 이제라도 나를 먼저 사랑해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간혹 그 애를 서운하게, 때때로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을 자주 반성했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을 아 벌리며 '사'를 발음하고 연이어 혀를 말아 차며 '랑'하고 내뱉는 것이 도무지 쉽게 되지가 않아 늘 애를 먹었다. 왜 사와 랑을 합쳐 발음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그에게 그래주지 못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좁고 어두운 내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두 번째 이별


그동안 나는 천천히 스스로를 추슬렀지만 때때로 무너지고 원망하고 질척였다. 아직 채 한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그 날의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 절대로 잊힐 수 없을 것 같았던 순간이 지워져 간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다. 그가 없는 주말은 이제 다시 예전의 패턴을 찾아갈 것이다.

나는 혼자서 영화를 보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소박한 끼니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먹는 것에 다시 시간을 쓸 것이다. 그와 만나기 전 훨씬 활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내 일상을 영위했었지만 어쩐지 뭔가 늘 부족하고 서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와 함께하는 동안은 뭔가 뒤죽박죽이 되고 자주 즉흥적이었지만 왠지 모를 충만함과 따듯함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며칠은 그와 만나기 전의 내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아 버벅거렸다. 내 일상 여기저기에 자잘하게 스며있는 그를 덜어내는 일은 어쩐지 그를 지운다기 보다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는 기분을 간혹 느끼게 했다. 나는 천천히 그동안의 우리를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억의 순서를 조금씩 과거 순으로 옮기며 그를 처음 만나던 날에서 그를 만나기 전까지 돌아갔다. 

그러다 보면 잠이 잘 오지 않아 매일 한편씩 옛 영화를 보고 이른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 글을 쓸 때마다 듣던 이소라와 김광진의 음악을 다시 찾아들었고,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걸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처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거나 찾지 못하며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다만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서로를 잘 모르던 그때처럼 반갑게 웃어 보이고 싶다.


첫 만남



사진_ 영화 봄날은 간다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어요.  https://youtu.be/tFZTEFn3X6c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청춘은 어떤 색 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