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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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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07. 2020

ㅎㅁ

종일 비가 내린다. 동네를 한 바퀴 두르자며 나섰던 산책길이 길어져 우산을 쓴 채 한 시간이 넘게 빙빙거렸다.

어깨에 걸친 가방끈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양말이 조금 젖기 시작하는 건 기분 탓일까. 돌고 돌아 들어온 곳은 집 앞 큰길의 프랜차이즈 카페다. 작고 독특한 카페가 많아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동네에 살면서도 결국 발길이 향하는 곳은 익숙한 맛과 온도의, 츄리닝과 맨얼굴로도 부끄럽지 않은 이곳이다.


어젯밤 나는 저녁을 배불리 먹고 이른 잠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눈은 뜬 것은 새벽 1시.

그리고 밤을 꼴딱 지새웠다. 아침에 다시 잠깐 선잠이 들었지만 혼돈한 내 마음은 어쩐지 깊이 잠이 들지도, 그렇다고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1년 넘게 다니던 샌드위치 가게를 그만뒀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버텨보았지만,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퇴사 후에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이 일을 계속하는 건 스스로 내 목을 조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만이 점점 내 마음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10월부터 이어진 몇 차례의 꽤 불편한 대화를 거친 후에야 나는 퇴사를 승인받고 12월의 마지막 날을 끝으로 샌드위치 가게와 작별했다.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것은 결코 내 생활신조와는 맞지 않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미 여러 번 얼굴을 붉히고, 울고 불고 했으니 사실은 이제 그럴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모두의 박수와 축하를 받으며 그렇게 나는 다시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퇴사 후에는 무언가 대단한 걸 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이 나를 누르지만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실은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보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최근의 연애가 끝난 후,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바쁜 일과로 누르며 그저 버틴 시간이었다. 시기가 생일과 겹쳐 조촐하게, 성대하게 여러 번의 축하를 받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혹은 첫차에서는 어지러운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영락없이 눈물을 찍어내어야 했다. 내가 매일 부은 얼굴로 출근하면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아직 연애의 환상 혹은 실연의 상처에서 허우적댄다고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이따금 그 시기의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곤 했다. 조금 더 높은 단계의 희망이나 굳어가는 마음을 풀어줄 해명이었을까. 아니다. 하나의 시절이 지나갔고 나는 자주 웃었다. 때때로 울었고.

해무가 깔린 어두운 바다를 함께 바라보았다. 당장의 눈 앞은 흐렸고, 저 멀리의 희미한 불빛이 주기적으로 반짝였지만 그 날의 우리는 그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허무와 혼미, 함몰과 흑막 같은 단어들이 느닷없이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사실 나는 어쩐지 자꾸만 내 인생이 점점 더 비극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 고꾸라졌다. 비극과 희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는데 다시 내려앉을 곳이 없어진 곡예사가 된 기분이 나를 잡아먹었다. 그저 모두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하루가 멀다 하고 술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체력이 조금 남아있으면 거의 지워진 화장을 마저 지우고, 샤워를 한 후 죽은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그조차도 힘이 드는 날은 다 제쳐두고 그냥 바닥에 널브러져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런 날은 큰 아이가 한번, 작은 아이가 한번 살금살금 내방 문을 열고 나를 들여다봤다. 문 사이로 들어온 빛을 따라 일렁이는 먼지가 옅게 포물선을 그리며 방안을 부유했다. 내가 보는 것이 먼지인지 다 빠져나가버린 내 영혼과 자존감인지 무척이나 헷갈렸다.

나는 최대한 멀쩡한 척, 피곤하지 않은 척하며 큰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그러면 아이는 그 작고 야무진 손으로 내 어깨와 목덜미를 조물조물 만져주곤 했다. 조금 정신을 차려 어기적대며 거실로 나가면 아이들은 내가 잠에서 깬 것이 큰 이벤트라도 되는 냥 이모가 일어났다며 강아지까지 합세해 셋이서 함께 나를 둘러싸고 정신없이 폴짝거렸다. 이전의 나라면 휴대전화 어플 속에만 있는 것 같은, 진짜 내 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을 소박한 통장잔고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써둔 서너 편의 글 같은 것이 나를 버티게 했다면 요즘은 그 깨알 같은 폴짝임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활력이었다. 이모! 이모! 하며 내 옆에 달라붙는 이 작고 따뜻한 생명체들이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가장 강한 힘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흐려지고 작아지는데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어떤 것이 내 발목을 잡고 끈질기게 늘어진다. 나는 그것을 감히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매일 출근길에 보이던 지하철 역사의 무지개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무지개가 사라진 날 유난히 빨간 뒤꿈치를 보았다. 개찰구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는 어떤 이의 새빨간 뒤꿈치가 가슴께에 걸려 숨이 막혔다. 돌파가 잘 되지 않는다는 기분을, 뒷사람의 조용한 언짢음을 나는 그녀와 함께 느껴야 했다.


또 어느 날 언니는 무심히 내 건강을 염려하며 더 이상의 비극은 겪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여러 고비를 함께 또 따로 넘기며 살아왔고, 아직도 모르는 것들 투성이인 삼십 대. 어쩌면 대단한 희망도 절망도 내게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다만, 비가 오는 평일에 일 없이 카페에 앉아 엘레나가 부르는 perfect day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일은 노래가 흐르던 영화 속 장면처럼 너무 현실적이라 현실감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쉽사리 절망이라는 극단이 떠오르진 않는다.


비 오는 거리를 헤매며 가사에 비가 들어가는 노래들을 연거푸 재생시켰다. 가사를 몰라도 흥얼거리는 옛 노래들이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와 걷던 그 길을 내가 홀로 걷는다. 비 오는 날의 냄새를 좋아하던 15살로 돌아가 우산을 접어볼까 했지만 여러모로 지킬 것이 많아진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꿈인지 아닌지 아득한 이 시간이 가만히 흘러간다. 답답한 마음이 드는 새벽마다 뒤적이던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에선 본 구절이 떠오른다. 글을 쓰는 것은 나를 모두 내보이는 것. 늘 어딘가 숨기 바쁜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매일 글을 쓰는 그녀들과 그들을 떠올려 본다. 얼마나 나를 더 내보이면 좋을지 그 적당함을 몰라 나는 오늘도 글을 마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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