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세상이 아직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슥.슥.슥. 여름이 다가온다. 봄이 오면 나뭇가지에 싹이 돋고 가지들이 마디마다 기지개를 편다. 앙상하던 가지엔 곧 무성한 풀잎들이 자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나의 겨드랑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보물 1호는 겨털이다. 슬프다. 여름이 다가온다는 건 나의 소중한 겨털들과 이별을 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말이다. 나의 겨털들은 긴 겨울 어둠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 어둠을 뚫고 얼마나 기특한가!
겨털은 생각보다 많은 역할을 한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을 때 혹은 더위가 푹푹 찔 때 샘솟는 땀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아주 귀한 녀석이다. 이것들을 다 밀어버리는 통에 여름이면 내 겨드랑이에선 홍수가 난다. 허한 겨드랑이가 슬퍼그런건지 아님 겨털들 남긴 눈물자국인건지는 모른다. 여름이면 얼룩이 지는 옷인지 아닌지 한 번 더 심려를 기울여 옷을 입어야 한다.
반대로 남성에게 털이란 없으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릴 적에 본 예능 프로에서 흰 민소매 가죽자켓을 입고 근육질 팔을 자랑하는 남자연예인이 나와 이야기했다. 자신은 팔과 다리 등에 털이 안 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선 남성성에 대한 위기와 공포가 피어났고 카메라는 다음 장면으로 경악하는 여성 연예인들의 표정을 보여줬다. 어떻게 남자인데 털이 안 날 수 있지! 하는 공포가 서린 표정의 화면이었다. 얼마 후 겨털이란 게 무엇인가 알게 될 쯤 생각했다. 나는 여름이면 털을 감추느라 움추러 드는데 그 남자연예인은 털이 나지 않아 움추러 들었다. 왜 같은 사람인데 나의 겨드랑이는 털이 나서 문제고 그의 겨드랑이는 안 나서 문제가 될까. 내가 여성이고 그가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남성성과 여성성만을 정상으로 구분짓고 성정체성에 충실하길 요구하는 사회에서 털이 갖는 이미지는 혐오거나 야성의 무엇이 된다. 그렇다면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털은 어떤 존재일까. 유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시 아침엔 여자가 되고 밤엔 남자로 자신을 규정하는 친구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다고 규정했다. 어느 날 여름, 그가 긴머리를 묶어 올리던 중 드러낸 겨털에 흠짓 놀란 기억이 있다. 그러곤 겨털에 당황한 사람은 한국인인 나 한 명 뿐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여성의 몸을 가진 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나는 '털이 난 여성’이란 사실에 놀랐을 뿐이었다. 그가 털이 있다고 해서 여성이 아닌 게 아니었고 털이 없다고해서 남성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는 남성이던 여성이든 그냥 사람일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깔았던 어플리케이션에서 넘어야 할 첫 단계는 내가 남성인가 여성인가에 답하는 것이었다. 선택사항에 중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성에 따라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사회가 한국이라는 걸 그 작은 스크린은 보여주고 있었다. 국내 최초로 군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했던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변희수는 남자였을 때나 여자였을 때나 변희수였을 뿐이었는데도 군대는 그를 ‘심신장애’로 이름붙였다. 그가 사망한 날, 과장된 근육질 팔을 하고 털이 없는 자신이 ‘덜 남성스러운’건 아닌가 그늘졌던 그 남자연예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에서 용인하는 수준으로 끼워 맞춰야 하는 흑백사회 한국이 만들어낸 결과다. 여성과 남성이 키스를 하는 장면은 되고 남성과 남성이 키스하는 장면은 청소년 교육 상 ‘유해’할 수 있다며 싹둑 잘라내는 한 방송국의 자체 검열. 서울시 한복판에서 퀴어행사를 하면 안 될 이유로 한 국회의원은 남이 불쾌해하지 않을 권리를 주창했다. 나다워질 권리는 늘 후자다. 변하사가 목숨을 끊던 사회에서 나는 여전히 나다워질 수 있는 한국을 꿈꾼다. 그래서 아무리 밀어내도 꿋꿋하게 자라는 내 털들을 나는 사랑한다. 나의 터부시되는 털들이여, 그들은 나의 보물이다. 나의 꿈이고, 희망이다. 생식기로 구분짓기 이전에 내가 가진 야성이고 그저 한 인간으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