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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Aug 03. 2022

오늘 날씨와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영화 <헤어질 결심>

비 내리거나 안개 낀 날 꼭 봐야 할, 박찬욱 영화

 비 내리는 수요일 아침. 남편과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운치 있는 청량산 산책을 마쳤다. 이런 날은 산밑에서 파전에 막걸리 한 잔으로 낮술이 제격이지만 지금보다 더 나이 들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누릴 수 있는 일이니 촉촉한 낭만만 간직한 채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차일피일 리뷰를 미뤘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떠올렸다. 영화의 배경이 안개다. 오늘 날씨와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영화다. 아직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날 감상해 보시길…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러닝타임이 길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나는 저녁 8시 30분 영화를 봤다가 엄청 후회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바람에 밤 11시가 다 돼서 영화관을 나올 때쯤엔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친구랑 <헤결>을 보고 온 큰아들은 인생 영화였다며 엄마는 어땠냐고 묻는데 시원스레 대답할 수 없어 난감했다. 결국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남편, 큰아들과 함께 며칠 후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보기 전날 잠을 푹 잤다. 말똥말똥한 상태로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었다. 아이스 라떼 한 잔까지 준비해서 영화관에 들어가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대사 한 마디, 장면 한 컷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두 번을 보니 확실히 이해가 잘 되었다. 처음 보고 나서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대사가 정확히 들렸다. 다시 보기를 잘 했구나 싶었다. 두 배로 더 좋았다. 


 박찬욱 만의 색깔, 느낌, 언어, 영상,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영화란 이런 거구나 싶다. 드라마가 표현하지 못하는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시간을 내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면서, 두 번이나 보게 하는 힘. 박찬욱 감독의 내공과 섬세함이 느껴진다. 박해일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탕웨이의 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형사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깔끔하고 친절하며 유능하기까지 한 남자 해준(박해일)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꼿꼿하고 긴장하지 않으며 의젓한 여자 서래(탕웨이)에게 점점 끌린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남녀가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고 긴장되고 유쾌하고 설렌다. 두 사람의 행동, 표정, 말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서로에게 끌릴 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의심하고 배신감을 느끼게 될 때, 그리울 때, 서로에 대한 간절함을 느낄 때, 헤어질 결심을 할 때,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이 애절하게 상대를 찾아 헤맬 때… 사랑을 해 본 어른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그 감정들이 스크린에서 섬세하게 표현된다.


 매일 책을 읽고 논술쌤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매일 글을 끄적이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 속 언어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마침내'라는 부사의 쓰임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마침내 죽었군요. 마침내 울었다. '붕괴'라는 말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사랑을 잃은 자는 무너지고 깨어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두 사람의 소통이 어색하고 신선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박찬욱 감독이 좋아한다는 노래 <안개>도 꼭 들어보길 바란다.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른 <헤어질 결심>의 ost , 우리 부부는 안개 낀 청량산 정상에서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며 감탄했다. 좋은 노래는 좋은 영화와 함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오래되어서 더 좋은 게 있다는 것이,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더해지는 것들이 위안이 된다. 나이 든 가수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우리 부부의 사랑도 오래오래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은은하고 낭만적이고 진한 여운으로 간직되기를 바랐다. 


https://youtu.be/X5D_K2eGfPk


 조연과 특별 출연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놓칠 수 없다. 오랜만에 영화에서 보는 고경표는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참 좋아했었다. 그의 연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김신영은 등장부터 웃음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무튼 천연덕스럽게 잘 한다. 말이 필요없는 연기파 배우 박정민, 어떤 역할을 맡겨도 기대 이상으로 해내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 볼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느낌을 갖고 있던 배우 박용우는 이 영화에서 웃음 담당이다. 짧게 나오지만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에 봐서 더욱 반가웠다. 



 큰아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 15분 정도가 잊히지 않는다고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부르며 절규하는 박해일의 연기는 확실히 압권이다. 해질 녘의 바닷가 풍경도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영화관에 울려퍼지는 <안개>를 들으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영화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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