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하루>
내 기억으로는 이란 영화가 처음인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남편이 이란 영화 두 편을 권했다. 영화를 추천하는 유튜브에서 봤는데 내가 좋아할 것 같단다. 설연휴라 바로 검색해서 보기로 했다. <하루>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중에 우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먼저 보기로 했다. 유튜브 영화로 1,000원 결제했다. 내게는 생소한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라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이 감독 대단하다. 작품들 대부분이 평점도 높은 편이고 다양한 영화제의 수상작이 꽤 된다. 오랜만에 집에서 괜찮은 영화 한 편 볼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남편과 2시간 완전 몰입했다. 기대 이상이다.
몰입감이 대단하다. 화려하거나 선정적인 장면 없이 단순한 사건 하나로 2시간을 꽉 채운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영화는 부인 씨민보다 남편 나데르에게 더 초점이 맞춰있다. 두 부부가 왜 별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작으로, 우연히 인연이 된 사람들끼리 얽히고 섥혀 서로 원하지 않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영화를 보면서 남편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며, 이란 사람들의 성향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무척 궁금해졌다. 우주라는 큰 세계로 보면 아주 작은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우린 너무 먼 사람들처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의 사정을 안다고 해서 그들과 나의 삶이 변할 건 없겠지만 멀리서나마 인류애 또는 공감과 응원을 보내고 싶어졌다.
은행에 다니면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는 나데르를 보며 부모에 대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2년 반 동안 암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생각나 콧날이 시큰해졌다. 요양병원에서 홀로 있다가 갑작스레 떠나버린 울엄마가 떠올라 가슴이 싸해졌다. 나는 몸이 불편한 우리 아빠엄마에게 나데르처럼한테 잘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이 든 부모가 병들어 곁에 있으면 자식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라 나데르의 고단한 생활이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떠나려는 부인을 탓하거나 감정적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나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면 나데르처럼 이성적으로 굴지 못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씨민과 나데르 말고 또 한 쌍의 부부가 있다. 나데르에게 고용된 라지에는 빚쟁이에게 쪼들리는 남편 호얏을 대신해 임신한 몸으로 4살 짜리 딸아이까지 데리고 일을 해야 하는 신세다. 멀리서 아이를 데리고 아침 일찍 와서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고 집안일까지 해야하니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어느 사회에든 빈부의 격차는 있고 각자의 가정 형편은 다 다르다. 가진 자는 고용하고 덜 가진 자는 고용되는 게 당연지사다. 그래서 가끔 가진 자는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사고, 덜 가진 자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연민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좀 다르다. 라지에를 고용한 나데르를 가진 자로 치부하고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오히려 영화 중반부까지 나데르를 가장 믿었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데르는 아버지를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별거를 하겠다고 집을 나간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며 딸을 키운다. 아버지로서도 거의 완벽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단한 상황인데도 딸아이를 돌보고 교육하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자기의 책임을 다한다.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여서인지 무척이나 이성적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0대 초반의 딸을 존중하는 아빠의 태도였다. 엄마와 아빠가 별거한 상황이고, 함께 살고 있는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아빠는 직장에 다니며 할아버지까지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도 딸은 아빠를 닮아서인지 무척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 보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럽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이처럼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 않는다. 딸은 아빠에게 조심스레 묻고, 아빠는 딸에게 정성스럽고 친절하게 답한다. 부녀 간의 신뢰가 돈독해보였다. 바람직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
그런 아빠와 딸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발단은 아버지의 간병인 라지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혼자 있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그날부터였다. 그날 화가 난 나데르와 라지에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라지에는 유산을 했다며 결국 나데르는 고소당한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단순한 다툼으로 보였던 사건이 생각보다 커졌다. 각자의 입장에서 조금씩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데르는 자신이 돌봐야 하는 아버지와 아빠를 굳게 믿고 있는 딸을 위해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한다. 라지에는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유산의 원인을 나데르 탓으로만 돌린다. 나데르 딸의 가정교사는 사실 진위와 관계 없이 나데르 편을 들었다가 라지에 남편의 협박으로 진술을 번복하기도 한다. 나데르의 딸은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자신조차 아빠를 위해 거짓 진술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기심으로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 사람도 나쁘다고 욕할 수가 없다. 그 점이 이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묘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란의 종교는 이슬람교다. 여자들은 히잡을 써야만 한다. 남성 중심 사회라는 게 느껴진다. 여자들이 지켜야 할 것, 여자들에게 금지된 것들이 많다. 코란에 손을 얹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걸 종교에 대한 큰 죄라고 여기는 것 같다. 간병인이라 해도 여자가 치매 환자인 노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가난한 남편도 자신의 아내가 혼자 있는 남자 집에 가서 일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결국 종교 때문에 나데르와 라지에의 갈등은 해결 국면으로 기운다. 라지에는 코란을 앞에 두고 끝까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유산의 원인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씨민에게 털어놓는다. 라지에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딸 때문이다. 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자신의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 그녀는 돈을 포기하고 진실을 택했다. 부모를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자식이지만 부모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되는 것도 바로 자식이다.
문화는 다르지만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보며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자식의 고충,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 각자 다른 색깔을 가진 부부 관계, 이기심으로 인한 거짓과 결국 밝혀지는 진실 등 공감할 만한 부분이 참 많은 영화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라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각각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마지막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딸이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구와 살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이혼을 결심한 씨민과 나데르가 법원에서 딸을 기다리며 따로 앉아있고 그 위로 자막이 올라간다. 두 사람도,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도 딸의 결정을 모른다.
나는 씨민과 나데르가 결국 이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데르는 너무 괜찮은 사람이고, 씨민도 나데르가 너무 좋은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빠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보석금을 내주려고도 하고, 사건을 빨리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나서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이혼을 해야 할 이유가 하나라면 헤어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열 가지는 되는 커플이다. 상황이 사람을 몰고 간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서 어떤 결정을 하는 데에 걸리는 게 너무 많다. 내가 씨민이라면? 너무 고단한 나데르 곁에서 딸과 함께 그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싶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나데르를 응원한다.
남편이 추천한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보고 다음 날 바로 이어 <하루>를 봤다. 생소하다고 생각했던 이란 영화가 내 취향에 꽤 잘 맞는다. 영화 <하루>는 '하루'라는 영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주인공에게 벌어진 일을 보여준다. 러닝 타임도 87분으로 짧은 편이라 집중해서 볼 만하다. 이란 영화 두 편을 보며 느낀 건데 이란이라는 나라가 도로나 교통이 참 복잡한 것 같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차와 사람이 마구 뒤섞여 있다. 날씨도 건조해서 도로에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환경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피부도 푸석푸석해 보이고 특히 영화 <하루>에 나오는 두 인물은 표정마저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있다.
무료해보이는 택시 기사 하데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손님에 대한 친절은 느낄 수 없고 돈을 벌겠다는 의욕도 없어 보인다. 그저 택시를 몰고 나왔으니 운행을 한다는 식이다. 누가 싸줬는지 모르는 푸짐한 도시락을 차안에서 먹는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하고 재미없다. 그런 그의 택시에 한 여인이 급하게 탑승한다. 무턱대고 자신이 지정한 병원에 가 달란다. 자세히 보니 임산부다. 얼굴엔 상처까지 나있고 아픈 건지 불안한 건지 아무튼 무척이나 급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하데스는 시동을 걸고 택시를 출발한다. 딱 봐도 택시를 몬 지 오래돼 보이는 하데스지만 여자의 두서 없는 이야기와 길 안내에 좀 헤매다 그녀가 말한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가 그 병원을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돌봐줄 아는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찾던 사람은 병원에 없다. 여인은 보호자도 없고 택시비조차 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영화 <하루>는 이렇게 택시 기사 하데스가 한 여인을 손님으로 만나면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너무나 평범한 소재가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두 편의 영화로 이란 영화를 이야기하기에는 좀 성급한 면이 없지않지만 이란 영화 감독들의 스타일이 조금씩 보이는 듯하다.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남다르다.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로 화면을 화려하게 채우기보다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디테일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몰입감이 좋다. 우리나라 영화와는 분명 결이 다른데 영화에서 느껴지는 인간미나 주제 의식 같은 것은 비슷한 면도 있는 듯하다. 아무튼 잘 알려지지 않은, 먼 나라의 영화를 보며 느끼고 공감하게 되는 이 경험이 참 좋다.
하데스는 졸지에 여인의 보호자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급한 여인의 사정이 딱해서 서류 한 장 접수해주는 것 정도로 끝내려 했겠지만 차마 그녀를 혼자 병원에 놔두고 갈 수가 없다. 병원 벤치에 앉아 의사나 간호사의 요구에 응하며 보호자 없는 그녀 곁을 지킨다. 게다가 그녀를 진찰한 의사는 그녀의 몸에서 폭력의 흔적을 보게 되고 임신 때문이 아니라 폭력 때문에 그녀가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고 말한다. 의사는 하데스를 그녀의 남편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저 우연히 만난 불쌍한 여인을 도와준 것뿐인데 하데스는 의사의 비난 섞인 눈초리와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억울하다며 화를 내지도 않는다. 전에는 하데스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너무 답답했을 것이다. 연애 시절 표현하지 않는 남편을 볼 때처럼. 그런데 이젠 좀 알 것 같다. 나에게 어떤 이익이 없어도 그냥 말없이 하게 되는 그런 거... 이제 이런저런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된 것처럼.
하데스는 그녀의 치료비를 내고 그녀의 서류에 보호자로서 사인을 하고 힘들어하는 그녀 곁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새벽부터 택시를 몰며 일해서 피곤했을 그가 자정이 넘도록 처음 만난 여인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왜 그런 표정으로 살고 있는지, 어쩌다가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그의 사연은 밝혀지지 않지만 그에게는 분명 간곡한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사연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연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이 힘들게 모은 돈을 기부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만이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의 무료한 삶에 그녀의 등장이 자극제가 되었던 건 아닐까 싶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한 여인을 삶에 어떤 애착도 없어보였던 택시 기사 하데스가 구원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조용히 행동하는 주인공에게 묵직한 감동을 받는다. 팍팍한 현실에서 누군가의 선의는 이토록 큰 울림을 준다. 몰입감 좋은, 따뜻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