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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Aug 25. 2023

행복한 노동

논술쌤으로서의 2년

비가 내린다. 토요일이다. 비가 오니까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남편의 말을 뒤로하고 비가 와서 걸어야겠다며 집을 나선다. 새로 산 코랄 레드 장우산을 펼친다. 24개의 짱짱한 우산살이 든든하다. 비를 좋아한다. 비를 품은 키 작은 하늘은 막연한 세상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쉬지 않고 8시간 수업하는 부담스러운 날이다. 비 덕분에 할 만한 일이 되었다. 20년 넘게 일하는 여자로 살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불행했다. 일하지 않는 여자로 3년을 살았다. 읽고 쓰며 별일 아닌 일들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논술 선생님으로 재취업해서 다시 일하는 여자로 산다. 사는 건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을 오래 하지 않는다. 사소한 행복을 구석구석 쉽게 찾아낸다. 비 내리는 주말이라, 새로 산 우산 색깔이 예뻐서, 8시간 내내 내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그날의 수업은 이파리에 맺힌 빗방울같이, 나를 향한 아이들 눈빛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목, 금, 토 3일은 논술 수업을 하고 일, 월, 화, 수 4일은 쉰다. 쉬는 날은 주로 책을 읽고 여기저기 끄적인다. 가끔 영화를 본다. 3일만 일하니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나는 내 밥벌이에 만족한다. 아이들과 함께 읽고 말하고 쓰는 시간은 내게 노동이라기보다는 ‘함께 성장’이다. 명함이 있는 직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즐거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3일의 수업이 시작되는 목요일은 약간 긴장한다. 일주일 치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의욕 때문이다. 3일 수업을 끝낸 토요일 저녁은 나른하고 달콤하다. 일하지 않는 4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분리수거를 하고 집 청소를 미리 해놓는다. 읽을 책도 고심하며 고른다. 일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분주하다.


2021년 9월, 송도 신도시에서 논술 수업을 시작할 때는 걱정이 컸다. 20년 넘게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쳤지만, 논술은 처음이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송도 학원가 건물 하나에 한, 두 개씩 들어차 있는 프랜차이즈 논술을 보고도 내가 직접 수업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우선 그해 4개월만 시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빠질 작정이었다.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는 동네에서 순댓국에 소주를 팔아보겠다는, 무모한 도전이 될 수도 있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수업을 즐겼다. 아이들과 크게, 자주 웃었다. 서울로 전학 간다는, 4학년 현준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전학 가도 논술 수업은 계속하고 싶다고 고집부리는 현준이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논술 선생님은 수업에 진심이야.” 하더란다. 피아노 입시생을 지도하는 현준이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그 말에 울컥했단다. 나에게 고마움과 감동을 전했다. 끝까지 수업에 진심인 선생님이 되기로 다짐했다.


2022년에 학원과 새 계약서를 썼다. 강사 계약서가 아닌 동업 계약서다. 혼자서 논술 수업에 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책임져야 한다. 4개월 동안 학원과 신뢰가 형성되었고 내 가치를 인정받아 높은 비율제로 급여도 책정되었다. 일의 무게감보다 자율에 대한 매력이 더 컸다. 적지 않은 나이에 논술 선생님이 되었다. 내 강의실은 일터가 아니라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겠다는, 내 꿈의 실습장이다.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감동과 깨달음을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글을 쓸 때 힘들었던 것들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글쓰기를 돕는다. 나의 진심이 내가 하는 말에 온전히 실려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내 키를 낮추고 소통한다. 20년 넘게 학원 밥을 먹으며 돈을 벌기 위해 일했던 나는 이제 돈이 아닌 꿈을 생각하며 일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이들과 논술 수업을 하면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다.


행복한 노동의 조건을 생각한다. 우선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책, 글, 말을 가르치는 일이 수학이나 영어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입시는 20대를 전후로 끝나지만 책을 통해 얻는 것, 글을 쓰면서 경험하는 감정, 정확한 표현은 사는 동안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니까. 그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내 수업을 짓는다. 나의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는 학생과 학부모 덕분에 내 수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마감된 반이 많아서 “죄송하지만 대기자로 등록하고 기다리셔야 될 것 같아요.”라고 자주 말한다. 수업 체계가 잡혀서 편해졌고, 일한 만큼 주어지는 보상에 만족스럽다. 특히 일하는 여성에게는 가족의 응원과 지지가 필수다. 일하는 아내 또는 엄마에 대한 이해, 집안일에 대한 분담과 도움,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야 아내 또는 엄마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에 집중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 세 남자에게 고맙다.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지만, 상황은 변할 수 있다. 당장 내일 일도 확신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기치 못한 일로 다른 길을 가야 할 수도 있고 갑자기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때가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단단한 삶의 태도를 다진다. 아침마다 물구나무서기로 세상을 뒤집어 보며 명상을 한다. 많이 생각하며 오래 걷는다. 내 몸이 책을 통과해 어제와 달라진 나를 목격한다. 글쓰기 근육을 키우기 위해 매일, 몇 자라도 쓴다. 가족이 내 사랑을 잊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다져진 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은 소중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나 자신이 더 소중하다. 그 일이 무엇이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그 일을 하느냐가 내 삶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우리 가족이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한 노동을 할 수 있기를, 내가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며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의 노동이든 그 시간의 대부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즐거움의 요소가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 일하는 누구라도 서로의 노동을 공유하고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하면서 아프지 않게, 일하면서 죽지 않게’라는 구호는 쓸모없어지고 ‘일하면서 즐겁게, 일하면서 행복하게’라는 말이 모두의 일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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