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쾌한 주용씨 Aug 30. 2023

슬럼프의 증상, 결정 장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오늘을 결심한다

며칠 전에 요즘 우리 부부가 슬럼프라는 글을 썼는데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슬럼프의 여러 가지 증상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골치 아프게 하는 게 바로 결정 장애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결정을 미루거나 번복하고 후회하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내일부터 산책을 다시 가야겠다 결심했다가 아침이 되면 '아니야, 산책보다 잠을 오래 푹 자는 게 더 중요해' 라며 애써 잠을 청한다. 9시 그룹 P.T.를 예약했다가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 같아 취소하고 다시 11시 예약으로 바꿨다가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하루 운동을 접어버린다. 몸이 무거워진 것 같아 단식을 생각하다가 불과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허기를 느끼고 허겁지겁 과식을 할 때도 있다. 자꾸 술에 의존하는 것 같아 단주와 절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우선 마시고 내일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이러고 있다. 


매일 글쓰기 다짐도 소용없게 되었다. 블로그에 짧게라도 매일 글을 써보자 했지만 일주일 만에 포기했다. 슬럼프에 빠진 나를 건져내 글을 쓰게 할 재간이 없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응모하겠다며 호기롭게 60일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일상의 루틴이 깨져버린 요즘 그것도 자신이 없다.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자 적다가 속에서 웅성웅성 떠들어대는 바람에 글에 집중하지 못하기 일쑤다. 그럴 때는 책으로 피신한다. 시끄러운 속을 글로 정리하는 건 너무 어렵고 차라리 책 속 이야기에 매달려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의 시간이 예전처럼 편한 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즐기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미뤄놓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나에게 휴식 같았던 읽고 쓰기가 요즘은 과제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한동안 아침 산책과 그룹 P.T.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고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 기분마저 덩달아 좋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돼버린 걸까? 사람 마음 수시로 변한다지만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바뀌어 버리니 난감하기만 하다. 목, 금, 토 3일 논술 수업을 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도 된다. 이럴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있고 싶다가도 하는 일도 없으면 더 심한 수렁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기운 빠져 있는 내게 남편은 "그냥 쉬어, 그동안 힘들었나 보다."하며 어깨를 토닥인다. 그걸로는 위로가 되지 않아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 하니까 "네가 왜?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이럴 땐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 한다.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남편은 어제 66년 생 회사 사람이 백혈병으로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나이 들수록 조문하러 가는 일이 많아지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경우는 예사롭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66년 생이면 남편보다 5살 많은 나이다. 아직 60도 안 된 나이에 병으로 고생하다 가족들을 두고 눈을 감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상투적이지만 인생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고 어떤 이유로 언제 떠나게 될 지 모르는 이 불안한 인생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흔들림 없이 산다는 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나 자신을 달래본다.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요즘처럼 태풍으로 계속 비가 내리는 날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감정에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고 그냥 시간에 날 맡겨보면 어떨까? 


오늘도 산책은 못 갔고 그룹 P.T.도 예약했다가 취소했다. 일상의 루틴은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몸은 무겁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좋지 않은 컨디션이지만 적어도 내 맘을 이렇게 몇 자로 적어보고 정리했으니 오늘 출발은 괜찮은 편이다.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려고 욕심부리지 않고 내 속에 어지럽게 엉켜있는 것들을 풀어내는 데 집중해보려고 한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보고 싶은 걸 보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그냥 나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내 안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이 흘러나오고 그것들을 조용히 응시하다보면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이래도 되나 하면서 무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안 하지도 못했다. 오늘은 분명히 결정한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오늘을 살겠다고. 

작가의 이전글 행복한 노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