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묘>와는 너무 결이 달라서 비교할 수 없다. 나는 1000만 관객의 <파묘>보다 <추락의 해부> 같은 영화를 더 좋아하는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더,더,더 좋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알게 되었다. 그 영화를 크리스마스 다음 날 큰아들과 함께 봤는데 우리 둘은 영화가 너무 좋아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들떴었다. 그때가 벌써 2021년, 큰아들이 군대 가기 전이다. 군 전역을 한 큰아들이 개봉일에 맞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예매했다. 엄마의 영화 취향을 아는 기특한 아들이다. 아들도 나도 <드라이브 마이 카>만큼이나 만족했다.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팬이 되었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의 배경 때문일 것이다. 4년 후 나는 남편과 도시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 부부의 결혼 30주년 파티는 제주도의 조용한 마을 아니면 산과 바다가 가까운 어느 지방의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치러질 것이다. 이런 마음을 품고 도시에서의 소란스러움과 복잡함을 견디며 산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 속 산속 마을은 꿈이고 로망이다. 환경이 다르면 사람도 달라지는 것인지, 물 좋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힘이 느껴지고 꾸미지 않았는데도 사람 그 자체에 아우라가 있다.
특히 주인공 타쿠미의 표정, 행동, 말투, 목소리 모두가 좋았다. 젊은 것도 아니고 잘 생긴 얼굴도 아니다. 자상하거나 매너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끌린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단단함이 부럽기도 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사람과 이웃이 되어 살아가면 좋을 것 같다. 재미있지는 않지만 든든할 테니까. 나이가 들수록 시끄럽지 않은 사람이 좋다. 말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알 것만 같은 사람, 생각이 달라 갈등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사이가 좋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산속 마을 주민으로 타쿠미와 이웃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후반부로 넘어갈 때쯤 갑자기 울컥, 그러더니 어이없게도 눈물이 흘렀다. 티슈 몇 장을 챙겨가지 않았더라면 곤란할 뻔했다. 콧물까지 났으니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아들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눈물이 터진 거냐고.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눈물 나는 포인트가 있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아이가 없어졌을 때 동네에는 느리지만 명확한 발음으로 아이의 상세 정보를 알리는 방송이 반복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아이를 찾는 일에 동참했다. 누구를 위해 특별히 나섰다는 표정은 없었다. 당연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나는 주변 실종을 알리는 문자를 대충 보거나 그냥 무시하며 꺼버렸고 이웃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도시에 살고 있는 나,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싫어졌다. 도시의 삶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산속 마을에서 단단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말 도시를 떠날 때가 됐나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는 아들과 이야기 나누며 나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영화 앞부분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산속 마을에 오로지 돈 때문에 글램핑장을 설치하려는 회사측 사람들이 '악'으로 보였다. 그러나 글램핑 설명회를 진행하는 남녀 두 사람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대화와 고민은 우리나라 그 또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산속 사람들에게서 도시의 회사 생활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점점 산속 마을의 삶에 물들어가는 듯 보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선과 악은 상대적일 수 있으며 그 관계는 계속 변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 사회도, 인간도, 자연도 희망이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가 아닐 런지...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다. 결말이나 제목이나 단번에 이해될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 감독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설렘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최근에 본 영화들 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최고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