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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Jan 16. 2021

50,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더 많이 가는 나이   

매일 죽음과 가까워지는 하루를 산다!



2019. 3. 24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우리가 살아가는 법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남편을 깨우는 전화, 그리고 남편의 격앙된 반응과 한숨. 주방에서 생선을 굽던 나는 불길한 느낌에 안방 문을 열어 남편을 살폈다. 안 좋은 소식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전화 통화를 마친 남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 친한 친구의 아내가 죽었단다. 그 친구는 남편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40년 지기 친구다. 


그의 아내는 49살밖에 되지 않았다. 만나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예전엔 언니라고 부르며 함께 식사도 하고 격의 없이 지냈던 사이다. 그 언니의 부고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떡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그랬대?' 딱히 대답을 듣겠다는 목적도 없이 중얼거리며 방과 주방을 왔다갔다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이틀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긴 했지만 결국 어제 새벽 눈을 감았단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장례식 분위기는 그리 침울하지 않았다. 슬피 우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일찍 낳아 키운, 장성한 아들의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인지 노인의 장례식처럼 담담했다. 고인의 남편 역시 조문객을 맞느라 분주했고 가끔 웃기도 하며 지인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런 죽음에 정신이 없기도 할 거고 장례를 치러야 하니 자신의 슬픔을 깊게 들여다볼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떠난 사람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는 장례식은 같은 아내, 엄마 입장에서 조금은 서운했다. 내가 떠나면 내 남편, 아들들도 이럴까. 잠시 슬프겠지만 이미 떠난 사람으로 바삐 날 보내려 할까.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잠시 나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작년에 아버지를 보내고 올해 큰이모님께서 떠나셨다. 동창들 부모님의 부고를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아직은 젊은 아내가 갑작스럽게 엄마의 자리를 내놓고 가버렸다. 죽음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장례식 밥이 익숙하다.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 100세 시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개인에게 갑자기 닥치는 이런 일들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고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계획으로 살아가는 게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자. 미련이 덜 남도록 현재를 살아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 거다. 훗날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나중에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장 하면 된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즐겁게, 열정적으로, 후회 없이 사는 거다. 


메멘트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지나온 시간이 후회스럽고 아쉬운 일이 많은 만큼 지금을 잘 살아볼 생각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다가 어느 날 내게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도 나의 오늘일 테니 기꺼이 맞이해야지. 내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는 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유쾌한 나로 기억하고 쿨하게 보내줬으면 좋겠다. 날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것보다는 웃으며 추억해 주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언니의 명복을 빈다. 그 곳에서 편안하기를, 이곳에서의 삶을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행복하게 추억하기를, 남아있는 남편과 아들이 언니의 가호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20. 4. 6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장이 너무 썰렁하다


일요일 오후 두 개의 부고가 왔다. 60대 좀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은 작년에 돌아가신 시이모님의 셋째 사위다. 남편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이기도 하고, 장례식장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저녁 시간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긴 암 투병 기간 고생하셨을 분께 가시는 길에 국화꽃 한 송이는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아빠도 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셔서인지 남은 가족의 노고와 상실감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남편과 준비하고 있는데 남동생의 연락이 왔다. 큰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92세의 우리 큰아버지는 내 국민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시기도 하다. 먼저 돌아가신 아빠를 대신해 당연히 우리 형제 모두 가야 할 가까운 친척이지만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우리 집의 하나뿐인 아들 남동생은 대구에 살고, 큰언니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고, 작은언니는 형부의 출장으로 발이 묶여 있었다. 네 형제 중 셋째 딸인 내가 대표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장례식장은 우리 집에서 2시간 남짓 걸리는 논산이었다. 


사실 거리도 멀고,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남편에게 논산까지 다녀오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아 코로나 핑계를 대로 안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몇 번을 고민했지만 가지 않으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내내 불편할 것 같았다. 작년 가을 큰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내 손을 잡고 나의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시며 '넌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놈이었으니까 잘 살 거야!' 하셨던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주저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눈치 빠르게 '가야 할 거면 얼른 출발해!' 한다. 마스크를 챙겨 출발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라는 책이 있던데··· 예상은 했지만 장례식장은 코로나 때문에 너무 썰렁했다. 경사는 안 가도 애사는 꼭 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훈훈한 가르침이 코로나 앞에서 무색해졌다. 마스크를 끼고 하는 조문, 편하게 손잡고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 참 낯설고 안타까웠다. 장례식 두 곳을 들러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되었다. 코로나로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지인의 죽음은 항상 허탈감을 남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도리를 다 한 것 같아 마음은 편해졌다. 


"죽으면 다 소용없어, 그냥 끝인 거야!" 장례식장을 나오며 남편이 혼잣말처럼 하던 말이다. 살았을 때 어떤 사람이었든 마지막 가는 길은 다 허망하고 쓸쓸하다.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예상할 수 없으니 준비할 수도 없다. 2년 넘게 암으로 힘들어 하시다 떠나신 우리 아빠는 결국 우리 가족에게 제대로 된 유언 한 마디 남기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날엔 나의 죽음,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죽음과 가까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나이가 들어서인지 죽음이 낯설고 두렵기보다는 누구나 다 맞이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담담함이 생겼다. 


오늘 나는 또 죽음과 가까워지는 하루를 산다. 




2021. 1. 16.

착한 사람들의 장례식코로나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에 사람의 죽음은 너무 외롭다. 장례식장이 너무 썰렁하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의 장례식장에는 화환은 많고 사람들은 없었다. 인사차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만 간간이 있을 뿐 넓직한 장례식장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식구들 몇 명 뿐이었다. 


큰아버님의 부고를 들었다. 4년 전부터 치매가 시작되었고 매년 명절에 뵐 때마나 눈에 띄게 안 좋아지는 몸 상태가 걱정스럽긴 했지만 죽음은 매번 갑작스럽고 놀랍다. 코로나 때문에 1년 동안 뵙지 못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내가 좋아하는 큰집 식구들의 슬픔이라 더욱 안타까웠다. 


큰집은 돈은 적지만 식구가 많다. 20년 전 무허가 집이었던 큰집에 처음 갔을 때 가난을 느낄 수 없는 푸짐한 밥상에 놀랐었다. 그 많은 친척들을 진심으로 대접했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큰어머님이 직접 쑤신 묵과 고소한 들기름 한 병씩을 들려서 보냈다. 시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면서 삼 형제를 낳아 기르고 집안의 대소사를 치러내시는 형님은 그 선한 웃음 때문에 더욱 존경스러웠다. 


가난한데 베풀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들의 착한 마음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명절이면 시댁 어른인데도 선뜻 찾아가고 싶어졌다. 버선발로 나와 반기는 큰집 식구들의 환대에 마음까지 환해지곤 했다. 돌아가신 큰아버님은 우리 둘째와 윷놀이하는 걸 참 좋아하셨다. 게임에 남다른 승부욕을 보이는 둘째가 끼면 큰아버님은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웃으셨다. 


큰아버님의 귀염을 독차지했던 둘째를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다. 복도에 화환은 없지만 크지 않은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스크를 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코로나라는 걸 인식할 뿐 오랫동안 앉아서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보며 베풀며 사는 사람들의 장례식장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착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후에도 외롭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년 동안 큰아버님을 집에서 돌봤던 큰어머님은 그사이 주름이 깊어지셨다. 큰어머님의 노고를 위로하자 남편을 보낸 노인은 똥오줌 받아낸 건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고 하셨다. 마지막 이틀 요양 병원에 있다가 식구들 얼굴도 못 보고 눈 감은 게 마음에 걸리신다고 하셨다. 듬직하게 자란 세 손자를 보며 아들 내외의 극진한 효성과 아내의 야무진 보살핌을 받으며 지낸 큰아버님은 가시는 길에도 무척 행복하셨을 거라고 진심으로 말씀드렸다. 


큰어머님은 우리 둘째를 보며 명절날이면 은행에서 미리 바꿔 놓은 잔돈을 준비해 놓고 윷을 들고 우리 식구를 기다리시던 큰아버님을 추억하셨다. 큰아버님 마지막 길에 우리 둘째를 데려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을 나오며 큰어머님을 꼭 안아드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계셔 달라고 가슴으로 전했다.  


항상 말없이 손을 꼭 잡으며 우리들을 맞이해 주시고,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시던 큰아버님의 따뜻함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앞으로도 명절이면 우리 식구는 자연스레 큰집을 찾아갈 것이다. 소박한 큰집의 착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윷놀이를 하는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에게도 착한 기운이 스며드는 듯 마음이 따스해졌다. 


오늘은 큰아버님의 발인이다. 남편과 시동생이 큰집 식구들과 함께 있다. 나는 이렇게 글로 큰아버님을 추모한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편안하시라고, 큰집 식구들 잘 살도록 지켜달라고, 그동안 감사하고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고 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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