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 excursion
올 첫 소풍날. 오늘은 학생들과 학교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인 웨러비 파크를 방문했다. 근처에 로즈 가든이 있어 장미 시즌이 오면, 때론 지루한 교실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이래 저래 자주 찾는 명소이다.
한가한 평일 오전 고목과 잘 깎인 잔디 위에 정원 호스가 은빛 물세례를 한다. 시원한 소음 위에 늦여름 볕으로 바싹 마른 흙길을 사각거리며 우리는 걸었다.
웨러비 파크에는 1877년 완성한 웅장한 맨션이 있다. 1839년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농축업(땅•가축•양모)으로 큰 부를 이룬 토마스 천사이드가 동생 앤드류와 1874년부터 3년에 걸쳐 지은 대저택이다. 이층 발코니에서 보는 파크 뷰와 그 위로 솟은 탑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입장료를 내고 맨션에 들어섰다. 전엔 몇 번 지나쳤을 뿐 오늘이 첫 입장이다. 그럼 잠시 19세기를 방문하자.
홀 입구를 지나면 왼편에 주인장 앤드류의 사진이 걸린 서재가 있다. 저택이 완성되자 동생 앤드류 가족이 입주해 살았고 독신으로 따로 살던 토마스는 나중에 들어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서재 옆방은 기다란 식탁이 놓인 정식 다이닝 룸이다. 민트 벽과 진열된 플레이트가 매치돼 산뜻하다. 방마다 다른 벽 컬러가 눈에 띄었다. 둥근 테이블이 놓인 브렉퍼스트 룸이 다음 방에 이어진다.
홀 건너편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응접실은 여성 전용처럼 꾸며졌다. 티타임 카드놀이와 잡담으로 들썩이는 치맛바람이 느껴진다.
침실보다 넓은 부엌에 들어서니 아궁이 쿡 탑 위에 가마솥과 구리냄비가 투박하고 고풍스럽다. 입식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지었어도 그을음 없이 부엌이 깔끔한 걸 보니 굴뚝이 벽 내부로 연결되어 지붕으로 올라갔나 보다.
홀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가면 남자들의 구역, 당구장이 있다. 당시 유행이던 야생 동물 헌팅 트로피와 스코틀랜드 자연을 화폭에 담은 액자들이 벽면을 장식했다.
아프리카 사냥에서 포획한 동물들의 두상과 표피가 흠칫하게 한다. 사자, 치타, 하마가 입을 쩍 벌린 채 포효하고 있지 않나. 천사이드 부자(父子)는 남성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나 보다.
당구장 옆 방은 식물들이 빼곡한 열대 분위기의 온실이 있다. 내게도 낯익은 잎들이 원래 19세기 종이었을까, 아니면 요즘 흔한 전시용일까. 향수병이 도져 고향땅 씨를 실어 와 뿌리지 않았을까.
이층으로 중앙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큰 그림액자가 보인다. 앤드류, 메리, 토마스, 바로 맨션 오너들의 초상화이다.
1845년 고국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토마스는 사촌 메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 부모의 반대로 홀로 돌아온다. 그 후 앤드류가 고국을 방문할 차례가 되자, 메리를 잊지 못한 토마스는 어떻게든 메리를 데려오라고 앤드류에게 부탁한다. 1852년 앤드류는 메리를 호주에 데려오는데 그들은 결혼한 상태였다. 메리의 부모가 앤드류와의 결혼은 어떻게 승낙하게 되었는지, 토마스의 러브스토리는 어떤 줄거리인지, 그가 글로 남기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메리를 위해 앤드류와 웨러비 파크 부지에 샌드스톤(sandstone)으로 이탈리안 르네상스 스타일의 대저택을 건축한다. 웨러비 맨션은 그가 축적한 부의 상징이고 후대에 전한 위엄이자 빅토리아주의 랜드마크이자 관광명소가 되었다.
형제는 학교와 교회등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폴로 경기와 피크닉 파티등 여러 이벤트를 그들의 드넓은 파크에서 주관했다. 불모지를 개척지로 일구고 여러 시스템을 도입해 멜번 서부지역을 스코틀랜드화 하는데 기여?했다. 토마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쳤다. 맨션이 완성된 지 10년, 그의 나이 일흔둘, 스물넷 스코티시 젊은 농부가 오스트렐리안 드림을 품고 고향을 떠나온 지 반세기 가까이 되던 해였다. 낯선 땅에서 자수성가해 대지주로서 부와 명성을 누리는 내내 그는 멜랑꼴리 했었다. 한편 Chirnside Park, Chirnside Avenue, Chirnsides by the River 등 그의 성을 딴 장소와 지명으로 그는 불멸한다. 후대 지역사회에 전해진 공적을 기리며 공립학교 Thomas Chirnside Primary School이 2018년 문을 열었다.
이층 침실은 가구와 소품이 모두 원주인이 쓰던 오리지널이라고 한다. 호주는 1, 2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온전해서 짧지만 그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좋다. 창백한 하늘색감이 시선을 끈다.
원목 가구 세면대와 화장대, 침실 의자들이 현대 감각에 뒤지지 않는다. 호주 장인일까 스코티시 장인을 멀리까지 고용한 걸까. 아니면 선박으로 직수입했을 수도.
19세기 여성 의상의 트렌드를 전시한 드레싱 룸이 있다. 몸에 꽉 끼는 코르셋이 그 시대 우아하지만 틀에 박힌 여성상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코르셋으로 조이고 페티코트로 스커트를 새장처럼 부풀려서 가는 허리를 강조하지만 코코 샤넬이 무릎길이 스커트를 유행시킨 1920년대까지 여성의 다리는 사적 영역이었다.
이 방 저 방 투어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선생을 계단 위에 앉아 잡담하며 기다리는 학생들이 있다. 잡담은 좋은 거다. 우정이 싹트고 영어 말문이 트이고. 이제 그만 내려가자는 말은 안 해도 다 봤냐고 묻는 눈빛이 역력하다.
— 여기 발코니 나와봤어여?
— 예스 티이쳐 !
— 예스 티이쳐 !!
맨션 안의 이국적인 사생활과 화려함에 홀딱 반하기를 기대한 건 내 소박한 바람이었다. 학생들의 관람 속도는 빛의 속도, 거의 속독 아니 속견이다! 결국 나는 혼자 뒤처져 전시된 방들을 훑으며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오디오 정보를 토막으로 주워 담았다.
그 많은 방 중에 세탁실을 못 찾고 헤매다 맨션 밖 뒷채에서 찾았다. 블루스톤 빌딩이라 했는데 블루가 안 보여서 한 바퀴를 돌아왔다.
세탁도 전문적으로 이뤄졌는지 세탁 전담반이 있었다. Wet Room - Dry Room - Dry Yard 로 나눠져 있다. 세부적 단계적 산업적 기운마저 느껴진다. 다양한 세탁 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Wet Room. 불을 때 세탁에 쓸 물을 데우는 온수 아궁이와 나무 개수대가 있다. 본채에 거주한 주방팀보다 세탁팀의 노동 환경이 뒤져 보인다.
Dry Room. 다리미가 앙징맞아 살짝 들어보니 허구헌 날 이걸 하는 사람은 어깨가 남아나지 않았을 듯 묵직하다. 여기에서 청춘을 보낸 또 다른 메리는 얼마나 더 일했을까 이 세탁실에서. 임금 노동자는 평생 이렇게 살았겠구나. 이 공간에서도 삶의 애환이 피고 졌겠구나.
원래는 맨션보다 장미였는데 내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늦게 늦게 5분 거리 로즈 가든으로 향했다. 더운 날 땡볕이 부담됐나 학생들은 진수성찬 같은 장미들을 멀찍이 두고 그늘을 골라 앉았다. 이제나 저제나 합류하나 눈길을 보내며 꽃들을 카메라에 수집했다.
꽃이름 같지 않아서 더 인상 깊은 레드 인투이션. 강렬한 빛깔 대신 향기는 미미한 하이브리드 짱짱한 꽃잎들이여.
아무래도 배가 고파 주저앉은 것 같다. 점심은 돌아가서 먹기로 하고 스낵만 챙겨 오라 했는데 지금 먹고 있는 걸까. 두런두런 함께 앉아있을 여유는 없고 예정된 버스 출발 시간까진 여유가 있고. 교실에선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해야 머리에 쏙쏙 들어올까 고뇌하듯 꽃밭에서도 나는 하냥 고뇌하는 영혼이다. 향기 빛깔 바람 이름 연구 나부랭이 그만하고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가자.
정류장 옆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역시 그늘이 최고. 여긴 멋지게 자란 나무들이 많아서 좋다. 눈은 핸폰 위에 머물러도 맑은 공기와 자연에 감사한다.
학교로 고고! 점심 먹고 힘내서 공부합시다. 소풍날 쉬려고 결석한 반 친구들 보란 듯이 우리 반 파이팅.
뭐가 또 블루인지? 아, 연보라가 지면서 슬레이트 블루로 변색해서 결국은 블루 포 유! 꿀단지에 빠진 꿀벌 한 마리. 오, 토마스 천사이드!
교실에서 왓츠앱 없는 학생들 앱 깔아 사진 보내고 프린트해서 나눠주다 보니 좋은 날 오늘도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웨러비 파크를 소재로 쉬운 그레이디드 리더(소책자)를 만들어 보면 오늘 소풍이 보람으로 돌아올까. 소풍이라고 와서 계획 없이 의도 없이 내 시간이 되었으니 배운 걸로 뭔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참고 기사___매거진 Great Australian Outdoors
https://greataustralianoutdoors.com.au/werribee-park-a-window-to-our-past/
Werribee mansion was built by Scottish pastoralist Thomas Chirnside in 1877 as a testimony to his colonial wealth and as a calling card to Mary Begbie, a woman he was enamored with. Mary’s parents rejected Thomas’ advances and instead allowed his younger brother, Andrew, to marry their daughter several years later. Truth can be stranger than fiction and the two brothers and Mary lived together at Werribee mansion. Mary went on to have four sons and two daugh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