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제가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학원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죠.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금세 알아보았어요.
“공부하느라고 고생이 많구나.”
저의 비쩍 마른 모습을 보고 짠하셨던가 봐요.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 주셨어요. 저는 생각도 없이 손사래를 치며 안 받으려 했죠. 그래도 찔러 넣으시는데 제가 계속 괜찮다고 하자, 순간 표정이 굳어지며 말씀하셨어요.
“적어서 그래?”
저는 얼어붙고 말았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놀랐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왔어요. 그제야 그 돈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재수생이 귀가하는 시간이 그렇듯 그 시간은 밤이었지만 그녀의 불그스레한 얼굴과 눈빛은 선명히 볼 수 있었어요. 우린 닮아 있었어요. 인생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얼핏 알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지 못했어요. 젊은 사람에겐 금세 기억의 뒤편이 되는 그런 마주침이었지요.
진희 엄마. 어릴 적 저희 집 맞은편에 사셨어요. 엄마와 계속 연락하며 지내오신 거죠. 그때 당신들은 보통, 아이들 네다섯을 낳고 고만 고만한 셋방에서 참 구질구질하게 잘도 견뎌내셨죠. 지금 생각하면 그립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진희랑 용학이랑 한 울타리에서 컸죠. 그 시절 기억이 희미하지만 다른 이웃들보다 왠지 가깝게 느껴졌어요. 이사를 하고부터는 엄마들끼리만 누구는 어디 학교를 가고 뭘 하고 사는지 얘기했더랬죠.
그 후 대학엘 갔고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동생 결혼식에서 진희 엄마를 뵈었어요. 먼저 저를 알아보셨고 외국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시며 동생 칭찬에 자랑스런 당신 아들 얘기도 선뜻 들려주셨죠.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씨가 제 또래 친구처럼 다정했어요. 우리는 산뜻하게 안부를 주고받았지요. 식장에서 우리 대화는 길지 않았죠.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집에 좋은 일이 생겨서, 언니 결혼식이었죠. 귀국했을 때 진희 엄마를 생각했어요. 진희 엄마도 오시냐고 엄마한테 여쭤봤더니 일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살다 보면 다이아몬드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생각해 보면 그건 길어야 이삼 분의 짧은 시간이었죠. 가끔 꺼내 보아요. 오래전 제게 건네신 당신의 마음을. 잊은 줄 알았는데 제 안에 있었나 봐요.
다이아몬드 같은 순간들. 돌이켜보면 그건 모두 제가 사랑받았던 순간이었어요. 곱씹고 되씹어도 질리지 않는 그 순간들은 제가 받은 순간들이었어요. 오랜 친구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나를 담고 우는 그의 눈빛이, 시내 어느 가게 직원의 그때 그 표정이, 여행지에서 꽃장수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가끔 서글퍼질 때가 있어요. 갈수록 저는 제게도 관심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요.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다고 하면 웃으실지 몰라요. 내 눈빛이나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다이아몬드 같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알지 못했어요. 오늘 생각해 봤어요. 그게 순간이라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만들어낼 수 있겠다 싶어요. 그녀가 생각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