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드너
나 왜 이래. 세시에 오라고 해놓고 뭘 사러 나오다니. 집청소로 정신이 없었다지만 세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잔디 사진을 보여주며 어떻게 수습할지를 묻고 클로버 죽이는 스프레이를 구입해 버닝스를 나섰다. 앞차에 부딪칠락 말락 급히 차를 몰아 집 앞에 도착하니 화물 트레일러를 단 차량 옆에 가드너인 듯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자외선에 손상된 팔뚝이 드러난 반팔티와 반바지에 각반을 차고 큰 체구와 솟은 복부, 역시 손상된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60대로 보이는 호주남자였다. 온전한 건 짧게 깎은 희끗하고 촘촘한 앞머리숱이었다. 이웃집에서 소개해준 정원사. 지난주 전화로 약속 시간을 정할 때 숨 가쁨 증상이 있다고 말했던 아저씨이다.
—제프?
—20분 기다리게 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이 반은 경멸조 반은 울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표정. 이런 표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냥 가버리지 않고 기다려준 게 다행이었다. 프런트 가든에 있는 나무들 가지치기해줘야 하냐고 물으니 밑동에 난 곁가지며 옆에 있는 나무를 덮을 만큼 커버린 나무는 쳐줘야 하는데 이제 꽃이 피어있어 자르기도 뭐 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 달 동안은 일이 꽉차 해줄수도 없단다. 라이프 풀 온. 비결은? 이끼에 잠식되고 클로버와 공생하는 잔디로 눈길을 돌려 급히 자문을 구했다.
—버닝스에 가면 잡초 죽이는…
—방금 버닝스에 가서…
—제초제를 뿌려..
—방금 클로버 약 사왔…
—자꾸 말 자를래? 물어 놓고 뻐킹 낫 리스닝
벌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분노 띤 목소리가 리듬을 타며 이웃까지 들릴 정도로 울렸다. 말을 끊은 건 잘못이지만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함께 화를 낼 수도 없고 듣고 있다는 말로 그 순간을 수습했다. 백 가든은 잔디가 다르다며 집 뒤로 안내했다. 직접 보여주고 질문할 게 있었다. 오랫동안 손 놓고 있다 엊그제 깎아 갈색이 된 잔디를 어떡하냐고 했더니 기다리는 수밖에 12월에나 그린그린해질 거란다. 숱이 없거나 땅이 꺼진 부위에 탑소일이나 잔디시드를 뿌려주면 어떻겠냐 하니 우선 살아남은 잔디관리부터 해주란다. 가지가 불균형하게 내려앉은 레몬나무, 꽃이 듬성하게 피기 시작한 살구와 복숭아 나무, 긴 가지 앙상한 무화과나무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무들도 손대지 말라고 한다. 가지 치기 시즌도 아니고 집을 팔려면 일 년 전부터 다듬고 가꾸는 것이란다. 이제는 늦었으니 집 그냥 팔고 새 주인에 일임하라. 체념주의자. 맘 편히. 그의 간단 처방에 맘이 가벼워졌다. 귀가 얇아서 좋을 때도 있구나.
프런트 가든 클로버는 다음 주 클로버 잎이 다시 나오면 사온 약을 물에 희석해 무릎높이에서 물조리개로 뿌리고 자갈밭으로 번진 잡초는 수퍼에 파는 라운드 업을 사서 뿌려 제거하고 백 가든 잔디는 그냥 깎아주고 물 줘라… 같은 말을 복습하듯 그는 반복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시간당 가격을 물으니 50불이라는데 그나마 떼 먹힌 적도 있었단다. 순노동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심장이 안 좋아 약을 먹고 있는데 수술 일정이 10월에 잡혀 있다고. 2개월이나 기다리냐 했더니 보통 대기기간이 그렇고 돈이 없어 개인 의료보험 같은 건 없단다. 심장병 때문에 숨이 가쁘고 다리까지 증상이 번져 있다고.
개인사나 들먹거리고 있을때가 아니라며 가봐야겠다고 했다. 의사들이 주는 약들이 방지효과는 있어도 몸에는 안 좋을테니 비타민이나 미네랄도 복용해 보라는 쓸데없을 말을 건네보았다. 그리곤 차 한잔하고 가시겠냐고 예의처럼 물었다. 집 앞에서 처음 건네는 친절이었다. 이웃이나 일 보러 온 사람들을 선뜻 안으로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뻐킹 어쩌고 f-word를 발사한 인간에게. 돈도 안되는데에 시간 보낼 일 없다며 그는 차 운전석으로 향했다. 하긴 돈도 안되는데 잡초제거며 이런저런 조언으로 이미 30분이 지났다. 나는 선뜻 악수를 청했다. 다시 내게 놀랐다. 살면서 이런 제스처를 취한 적이 없었다. 살면서 이런 캐릭터를 마주한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도움받는 걸 당연한 권리로 알고 살긴 했다.) 계산 없고 가식 없고 돌직구에 선한 구석이 있는 사람을.
아까 프런트 가든에선 수도 미터기를 반쯤 덮고 있는 꽃나무를 지적하며 검침원이 미터기 못 찾고 돌아가면 집주인이 벌금으로 천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재앙이 가능하다니. 웃기려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추운 계절에 피어서 대견했던 애를 지난해 숏커트 쳐놓고 볼 때마다 마음이 휑했는데.. 분홍꽃 이름이 뭐였더라 나중에 앱으로 검색해 보니 비슷하게 생긴 꽃이 나왔다. 할 수 없이 한번 더 제프를 귀찮게 했다.
몰라. 가지 하나 꺾어다 가게 가서 물어보렴. 글도 말과 닮았다. I do not know. Take a piece to a nursery and ask them. 동음이의 스펠링이 깡패 수준인데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