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4
여전히 엉망.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 지각하는 것. 머리 안 빗는 것. 못 버리는 것. 유효기간 넘긴 우유.. 인연이 다한 친구..
2025, 돌아온 미스 존스
주드/톰/샤즈 & 미란다, 네 친구와의 우정이 여전히 현현하고 못 버리는 나도 미련 없이 정리했을 옛 연인 다니엘 클리버는 절친이 되어있다. 나 같으면서도 나 같지 않은 존스를 또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전업주부가 된 싱글맘 브리짓. 그녀는 여전하다. 뒤뚱 잰걸음에 발을 헛딛고 넘어지기 일쑤이고 성향인지 노력부족인지 요리며 집안 청결상태가 심상치 않게 엉망이다. 늙은 엄마 브리짓은 애들 학교에 가면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쫄고 싱글 학부모를 소외시키는 듯한 정기 학부모 인터뷰가 모질게 싫다.
그런 그녀가 아들 빌리의 과학 선생, 미스터 월리커의 호루라기에 깬다(?). 등교길 학교 앞 호루라기 소음은 엄마들의 비호감. 첫 눈에도 깐깐해 뵈는 그의 인상은 딱 마크 다아시의 그것이었다. 뭔 놈의 우연인지 이후 과학 선생은 브리짓이 당황해 할 순간에 깜짝 등장하곤 한다. 나무에 높이 올라가 꼼짝 못 하는 아이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무 등걸에 매달려 있을 때, 그때 아이들을 구조해 준 연하남과의 하룻밤을 위해 카운터에서 갖가지 콘돔을 결재할 때, 직업 소개의 날, 빌리의 교실에서 티브이 프로듀서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월리커를 인터뷰하다 초파리에 영혼이 있다고 우길 때.. 월리커에 비친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실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과학적 마인드와 작은 곤충에서 영혼이니 매직이니 기적 같은 것을 기대하는 엉뚱 마인드가 부딪힌 지점은 피디의 컷 외침으로 일단락되는데.. 죽지 않는 초파리의 영혼은 죽은 남편 마크가 불멸의 영혼으로 언제까지나 그녀와 아이들을 지켜주리라는 바램같은 것이었으니.
2025 브리짓 존스는 슬픔을 다루는 존스의 유머러스하고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인권변호사로서 4년 전 수단에 파견되어 사고 사망한 남편을 애도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는 그녀의 일상은 가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벗어나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주는 행복감과 안정감이 크다. 다만 오늘도 파자마 바람이다. 겉옷 밑에 껴입은 것이 24년 전 입었던 바로 그 검정 무늬 빨강 파자마 웃도리라니 (웃도리는 롱런한다). 그녀의 산부인과 주치의 닥터 로링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 산소마스크 씌우기 전에 자기 것부터 쓰는 거라며 파자마(상복) 탈복과 자기 돌봄을 역설한다.
—뭔 소린지 알지?
—산소마스크 다시 언급하면 이 핸드백으로 냅다..
—핸드백이 무서워? 뭔가를 시작해. 파자마 벗어던질 이유를 찾으라고!
—글쎄, 패션 하고는 거리가 머시지.
—무례하긴
—밀라노는 지금 파자마가 대세야. (웃음 포인트)
..
..
—내 충고는 이거야. 네게 필요한 건..
—노 노 노 노. 섹스 따위 언급하지 말아죠.
—오, 하느님, 노! 책을 읽어. 부엌 서랍 청소도 하고. 섹스는 잊어. 때 되면 하는 거지. 내 충고는 따로 있어. 직장으로 돌아가!
사실 요즘 아무리 친해도 이렇게 대화하는 영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다 너 위해서 하는 소리야 같은 소리가 통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이 장면은 제인 오스틴의 화법이 패러디 된 것 같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이모 캐서린 드 버그의 불꽃튀는 언쟁을 보는 것 같았다. 다아시와의 결별을 설득하는 캐서린에 맞선 엘리자베스의 당돌함을 브리짓이 오마주하는 것 같다. 내겐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최고의 카타르시스였고 이 영화에서도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자타공인 유능한 티브이 프로듀서의 복귀가 임박했다. 나무 위에서 아이들을 구조해 주고 그 후 틴더에서 플러팅도 했던 29세 연하남과의 만남이 맞물리며 그녀는 점차 생활에 활기를 찾는다. 지나갈 열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또는 착각하는 척하는 토이보이 아도니스는 결국 그녀의 적수가 아니었을 뿐.
Have You Met Miss Jones?
미스터 월리커를 따라 다른 학부모 도우미들과 탐험 캠핑에 나선 미시즈 다아시. 런던을 벗어나 호수지방의 광활한 자연을 학생들과 몸소 체험한다. 하이킹 도중 소나기를 만나게 되고 비를 피해 동굴에서 1박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후 월리커와 브리짓은 모닥불 앞 담소를 나눈다. 캠프에 웬 마시멜로우? 캠프에 필수는 마시멜로우!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 브리짓이 문득 묻는다.
—자녀 있으세요?
—오, 노. 노 노, 없어요. 우습게도 언젠가라고 막연히 생각만 해왔지요. 근데 어느 날, 주기율표 테스트를 준비하다가 이게 지금 스물일곱 번째 테스트를 내고 있는 거죠. 그 사이에 어.. 가족 같은 걸 가지는 것에 대해 정말로 생각할 시간이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근데 좋아요. 괜찮아요. 나는.. 이게 맞아요.
—그런 것 같네요.
실은 내밀한 고백을 담담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주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울음 포인트)
반면 막바지 스노우씬에서는 마음 속에 생겨난 지진이 그의 크고 까만 동공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뉴턴에 대해 토론하러 왔다고 말한다. 정확히는 뉴턴의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이다.
—모든 작용에는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해요.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우리 존재의 불가피함이죠. 미시즈 다아시.. 당신이.. 내겐 그런 ‘힘’이라고 말하러 왔어요. 그리고 뉴턴이 예견했듯, 그건 불가항력이에요. 나는 봐요. 바로 지금 여기 서서, 느껴요. 그건 내가 소년일 때, 처음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사랑했던 것들처럼 리얼해요. 미시즈 다아시, 우리 과학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규칙’이 아니에요. 그건 사물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죠. 아름다움, 콕 집어 말하자면.. 당신 안에 있는.. (감동 포인트)
그동안 그는 홀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마술 같은 매력에 똑같은 크기로 되갚아 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힘에 이끌려. 이런 걸 기적이나 매직이라고 하지 않나. 브리짓이 믿어마지 않았던. (믿으니 정말 이뤄졌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거라면 얼마나 피곤하고 또 얼마나 좋을까.
Am I the Same Girl
어쩜, 사랑을 과학으로 푸니 뿌리치지 못할 사랑이 내게도 닥칠 것만 같다. 2001년 마크와의 스노우씬보다 더 로맨틱한 눈발과 말발로 그녀에게 또 한 번 해피엔딩이 찾아왔다. 브리짓은 단순히 스캇 월리커 때문에 행복해진 게 아니라 그녀 인생에 스캇이 와줘서, 스캇 인생에 그녀가 똑똑 문을 두드려 줘서, 서로의 빈 곳을 직감하고 채우게 된 것이다. 인생의 새 챕터가 열렸다. 나라는 인간의 영혼에 전율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 (살면서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생긴다고 믿어보자) 뒤돌아 보지 말고 직진하기를 멀리서 응원해 본다. 그녀 아버지 말대로 삶은 단지 살아남는(survive) 게 아니라 살아가는(live)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