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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을 소개합니다

AMEP

by 블루검

암하릭!

파시!

파시토!

우르두!

힌디!

차이니즈!

희미한 안개에 둘러싸인 듯한 모호한 일상 속에서 분명한 선 하나를 그어보자는 심산입니다. 구글 영어 사전! 요즘 세상은 구글이라는 도구가 있어 언어를 익히는 데 편리합니다. 구글 사전에 영단어를 넣어 언어별로 클릭해 가며 교실 티브이에 띄웁니다. 클릭마다 번갈아 가며 외치는 내 목소리는 거의 아우성에 가깝습니다.


각자 스마트폰으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를 위한 우리 반만의 특별 서비스입니다. 새 단어를 배울 때는 바디랭귀지나 쉬운 영어로 설명하기보단 사전을 이용하는 것이 호응을 얻습니다. 모국어는 세상을 향해 건너뛸 수 있는 디딤돌이 됩니다. 모국어를 읽지 못하는 학생에겐 소리 내어 읽어주는 같은 나라 학생이 있으면 됩니다.


사투리, 내 고장의 말처럼 사랑스러운 언어는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스러워지는 것. 다음에 고향에 돌아가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운 게 되어있을까요. 세상에 널린 언어들이 그 이름만으로도 지구 별 어느 동네 사투리같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우리 교실을 채우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런 생김새와 표정과 차림으로 앉아 있어서 일까요. 내 언어를 함께 쓸 수 있는 사람 수가 제한되어 갈수록 그것이 소중해지는 것은 향수병처럼 필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정일 겁니다.


우리 반은 국제정세에 따라 구성원과 교실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AMEP (Adult Migrant English Program) 반이기 때문입니다. 호주는 인도주의 프로그램이라는 정부 정책이 있는데 분쟁지역 피난민이나 자국에서 인권을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입국을 허가하고 정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2차 세계 대전이래 현재까지 이어져오는데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 기아 내전으로부터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자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유엔의 협력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도착한 이주민들은 주거지와 생활비, 자녀 교육과 영어 교육을 정부에서 지원받습니다. 이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 바로 인도주의 프로그램과 역사를 함께해 온 AMEP입니다. 그 역사는 오늘 우리 반 교실에도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현재 우리 반 학생은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파키스탄, 인도, 중국인입니다.


인도주의 비자가 아닌 사업 이민이나 기술 이민 등이 호주 이민자의 90%를 차지합니다. 우리 반의 중국인, 인도인은 이런 종류의 이민을 한 학생들입니다.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는 성인 이민자라면 누구나 510시간의 AMEP 영어수업을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AMEP는 TESOL 자격증을 소지한 호주 내 정규 교사가 지정된 기관에서 가르칩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2년 간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었고 정상수업으로 돌아온 현재는 그 기간이 510시간에서 무제한으로 바뀐 상황입니다.


인도주의 프로그램으로 호주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기초반은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나라에 따라 상황이 다른데 미얀마나 아프리카인들은 대개 자국에서 안정된 교육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파벳을 외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단어에서 문장으로 넘어가는 게 고비인 케이스입니다. 초등교육을 몇 년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그나마 수업 적응이 쉽습니다. 우리 반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고등교육은 받았지만 영어과목에 소홀했던 학생들도 우리 반에 배정됩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중국인 학생이 이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미얀마에서 온 카렌, 카레니들이 다수를 이루었는데 아프간 사태로 인해 올해는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내년엔 우크라이나 학생들의 행렬이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살만한 곳에 잘 왔습니다. 정착해서 살아보고자 합니다. 총 천연 문화, 갖은 국적, 특이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서로 알고 싶습니다. 단 하나 걸리는 것이 언어라는 벽입니다. 품고 잔다고 매일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시간과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대학에 가고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 맞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하면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영어는 구사하고 싶습니다. 내 권리를 알고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고자 합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사는 것처럼 살다가 돌아갈 때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 반은 그 첫걸음입니다. 영어 레벨이 비슷한 남녀노소가 한 곳에 모여 친해지고 서로 돕고 배우며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써가는 장입니다. 따로 또 같이 하는 고독한 경주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달콤한 추억으로 훗날 그때가 좋았지 하고 회상할 수 있다면 선생이란 역할을 하는 저로서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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