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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Sep 19. 2023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가 있는 밤


Young & Jackson

영 앤 잭슨은 페드 스퀘어 맞은편에 있다. 제임스 조이스보다 훨씬 형님뻘인 아이리쉬 이민자, 영과 잭슨의 이름을 딴 유명한 펍인데 함께 와서 식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왁자지껄한 메인 홀을 피해 이층 코너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리는 와인과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조샘은 어제 본 영화 ‘영웅’ 이야기를 했다. 안중근은 우리에게 멀리 느껴지지만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펍이 문을 연 즈음 태어난 사람이다. 영웅은 영웅답게 생을 마쳤고 짧은 생이 새삼 안타까웠다. 정샘은 오래전에 벨기에에서 맛본 맥주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리쉬 기네스보다 진국이었을까, 그때부터 애주가가 되신 건가, 속으로 짐작해 봤다. 조샘과 나는 와인도 맛만 보는 타입이다. 나는 영국에서 한잔 마신 기네스로 몇 주간 몸에 발진이 생겼던 얘기를 했다. 술은 커녕 커피도 못 마시는 체질이라, 음식 입맛은 까다롭지 않은데 마실 수 있는 건 물 주스 우유뿐이라, 누구 말대로 재미없는 인생이 되어 버렸다. 시네마로 향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샘들이 디저트로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우리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겨울밤 화롯가에 모인 자매들처럼 밤을 새워 얘길 해도 좋을 것 같았다.


Federation Square

페드 스퀘어는 그새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은 듯 밤 분위기를 냈다. 검은 하늘이 퍼플로 깜짝 변신한 빌딩을 꽤 돋보이게 했다. 작년 이맘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했고 도시는 열흘 정도 몇몇 랜드마크를 퍼플로 밝혔더랬다. 매년 이렇게 여왕을 기린다면 우린 매년 영화와 함께 조명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왕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한국 영화를 보러 시티의 페드 스퀘어에 오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장소가 영화까지 럭셔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놓칠세라 계단 주위에 서 있던 일행에 폰을 주고 사진을 부탁했고 우리는 소녀들처럼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을 땐 모든 것을 잊는 것 같다. 꽃향기를 들이마시는 순간처럼 집중해서일까. 내 작은 향기를 남기려고. 그 와중에 나는 한쪽 부츠 힐을 부러뜨린 것 같았다. 바닥을 디딘 힐이 왠지 흙속에 빠진 듯한 촉이 왔고, 순간 스퀘어에 깔린 돌조각 사이로 힐이 들어갔나 싶었다. 다음 스텝을 내딛고선 힐을 들어 그게 반토막이 난 걸 알게 됐다.


Life is Beautiful

맛있는 멜번의 커피맛도 와인맛도 시네마에서 자막 없이 보는 한국영화에 비할까. 그것도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영화는 복고풍에 뮤지컬이 가미된 인생은 아름다워. 한국에서는 진즉에 개봉된 영화일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염정아는 콧매는 달라졌지만 눈매는 예전 그대로였다. 우리 세대의 자화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울 극장, 사랑과 영혼, 장미 한 송이,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우린 아직 이별이 뭔지 몰라~ 이별이 뭔지 모르고 안녕이라고 했다가 우주의 마지막까지 가본 건 멜번에서였지.. 세포사이마다 간직해 둔 옛 감성을 흔들어 깨우며 울리고 웃기다가 염정아가 부르는 세월이 가면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우린 하차하듯 극장에서 내려 스퀘어로 걸어 나왔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 빛났고 세월은 정말로 갔다. 우리는 지금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까.


City Walk  

페드 스퀘어 맞은편 플린더스 역에서 샘들과 헤어졌다. 나는 차가 주차된 곳까지 시티 중심가를 가로질러 몇 블록을 걸어야 했다. 밤공기가 차갑지 않아 굽이 다른 하이힐 부츠를 신고도 차분히 걸을만했다. 월요일 밤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새로 생긴 샵이 몇 군데 눈에 띄었다. 타운 홀을 지나고 버크 스트릿 몰을 가로질러, 스완스톤 스트릿을 따라 시티 캠퍼스가 있는 RMIT까지 걸었다. 라트로브 스트릿은 어떻게 바뀌려는지 거의 한 블록을 공사 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내 젊음이 지나간 거리들을, 절름거리며 두리번거렸다. 뒤에서 불쑥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못 들은 척하고 가는데, 앞서가다 주춤하더니 다시 괜찮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중얼거리곤 내빼듯 길을 건넜다. 멜번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다. 그쪽이야말로 괜찮기를. 두리뭉실 몇 묶음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흩어져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도시를 잊었다 한들 변하는 건 없으리. 자정이 가까웠고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Sweet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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