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PD 데이 (Professional Development Day)였다. 방학 중에 하는 PD가 달갑지 않았지만, 오전만 하는 일정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했다. 일주일 안 본 얼굴들이 이리도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옷 예쁜데? 포르투갈 다녀온 사진 보내주! 방학 어떻게 보내? 우리는 한솥밥을 먹는 진짜 팀이다. 코디, 산드라는 신경통이 도졌는지 절뚝댔고, 파하나는 메이크업을 했고, PD를 주최하는 매니저 리디아는 더운 듯 열을 냈고, 질롱팀도 도착해 있었다.
워밍업으로 리디아는 수퍼마켓 ALDI 알디 카탈로그를 뿌리고는 그룹으로 다섯 가지 수업 활동을 뽑아내라 명했다. 우리 그룹은 디지털 리터러시(Digitsl Literacy). 정신없이 현란한 광고지와 컴퓨터/핸폰을 가지고 우리 학생들이 뭘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카탈로그를 넘겨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생각하고 있던 한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사야 되는데 생각만 하고 있던 태양광 정원등이다. 한날한시에 만들어 낸 양, 제품도 가격도 전과 똑같았다. 일년에 한번 하는 스페셜 세일이다. 카탈로그 날짜를 보니 지난주에 뿌린 거였다. 이 아이템은 인기가 있어서 다 팔렸을지도 몰라 검색을 해보니, 가까운 알디마다 아직 그득 남아있었다.
태양광 정원등은 몇 년 전 알디에서 구입해 처음으로 매달아봤다. 해 질 녘 노르스름한 불빛이 번질 때 태양광이 이런 거구나 했었다. 비바람이 몰아친 후에도, 태양광 패널이 흙 위에 제대로 꽂혀있는지 모를 때도, 여전히 불빛은 되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풍경이 달라진 걸 알았고 나중에 나가서 들쳐보니 패널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얼마 전 하루 고용한 정원사의 소행이렷다. 멀쩡하던 꽃나무를 뿌리째 드러낸 건 이미 죽어있더라는 이유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이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또는 호기심이었는지 본인밖에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교체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타이밍이 좋아 카탈로그를 가져와 나눠준 리디아가 고맙기까지 했다.
학생들과 뭘 할 수 있을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방학 동안 집에서 책 아니면 유튜브만 들여다봤더니 머리가 굳어버린 건지도. 다행히 교사들 여러 명이 모여 머리를 짜내니 여러 아이디어가 스프링처럼 솟아올랐다. 속으로 태양광이니 정원등이니 딴청을 피웠지만 수업에 활용할 거리가 늘어나 기분이 업되었다.
우아! ALDI 카탈로그로 이렇게나 많은 수업 활동을 짜낼 수 있다니.
쇼핑 리스트를 만들고, 파티 버짓을 짜고, 비교급으로 가격을 비교하고, 형용사를 찾고, 다른 수퍼와 가격을 비교해 보고, 제품의 광고를 써보고, 같은 품목들끼리 나눠보고, 음식 피라미드를 그려보고, 쇼핑 관련 Kahoot 게임을 하고,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역시 팀이다.
다음으로 교사들 몇 명이 각자의 교수법을 발표했다. 그 중 클라우뎃의 내용이 참신했는데 그녀는 초등교사 경험이 있다고 했다. 서로 잘 모르는 교사의 이름을 알자고 네임 텍 스티커를 돌렸고 PPT를 프로페셔널하게 준비해 왔다. My name is ______. What’s your name? 을 릴레이식으로 하는 아이스브레이커를 제안했고 iSLCollective.com 이라는 사이트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팀에 속하지 않고 휴가 간 교사의 반을 맡아 커버해 주는, 어쩌다 보게 되는 교사였다.
모닝티 시간에 마주하고 물어보니 4년간 초등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초등교사 경험이 ESL을 가르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우린 입을 모았다. 흠.. 나는 십년을 초등에서 일했는데 그 노하우가 지금 내 교실에 얼마나 녹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이 잘 따라와 주고 만족해한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 같다.
PD가 끝나고 가까운 알디로 차를 몰았다. 태양광 정원등이 방금 도착한 듯 박스로 쌓여있었다. 집에 나무가 많은 걸 감안해 태양광 초롱불등도 두 개 골라 잡아 체크아웃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알디에 처음 보는 캐쉬어가 앉아있었다. 피키 블라인더스 (Peaky Blinders) 헤어를 하고 앳되 보이는 얼굴이 신참 같았다. 바코드 스캔을 하며 흔히들 건네는 인사를 했다.
How has your day been so far?
모르는 사람끼리도 흔히 하는 인사말 같지만 또 그렇지가 않았다. so far? 기분 좋은 날이라 이런 질감의 문장도 듣게 되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물어봐줘서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응, 오늘 썩 괜찮아! How are you? 나 How is it going? 과 다를 바 없는 말이지만 so far 라는 두 마디에 여운이 남았다. 처음 보는 사람도 친근하게 어딘지 달콤하게 느끼게 해주는 두마디였다. 내 하루가 지금까지 어땠는지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듯한 착각.
How has your day been? 이 문장을 사람들이 즐겨 쓰지 않는 건 발음상 입에 찰싹 붙지 않는 이유도 있으리라. 끝에 오는 so far 가 그나마 발음상으로도 보상을 해주는 정도이다. 건네보지 않은 이 달콤함을 발음이 좀 꼬여도 감수하고 so far 에 힘을 주어 누군가에 무심한 듯 해보자. 무심코 (생각코) 집어든 알디 카탈로그 한 뭉텅이, 그 작은 쥠이 돌고 돌아 내게 오늘을 주었다. 그런 날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