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의 교실 정돈을 뒤로하고 스타프룸에 가니 크리스가 테이블에 앉아 일을 보고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딴 직장에서 수업이 끝나면 눈썹 휘날리며 여기로 오는지 복도에 바람이 인다. Hi Chris. 그 앞에는 손봐야 할 종이서류가 쌓여 있었다. 난 그 일들을 가뿐히 마친 상태. 기분 좋게 수업교재를 캐비닛에 담고 있는데 돌아보며 뜬금없이 한국 영화제 하는 거 아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9월이다. 매년 이맘때 한국 영화제가 열린다. Oh right, now it’s early September!
Have you seen Parasite? 그가 물었다.
Yes, have you?
No, is it scary?
It’s fun, no horror.
오징어 게임에서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그 실없는 게임을 봤나 보다. 마음이 여린 거구나. 정말 무서울까 궁금했다. 외국 영화를 보는 것이 그 나라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의 파장을 줄까. 그저 엄살일지 모르지만 필시 한국인이 강적임을 간파한 것이다.
어느새 이야기는 Winter Sonata로 흘렀다. 욘사마가 나오는 옛 드라마, 겨울 연가를 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에 슬픈 장면이 나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드라마가 그는 좋았고 마지막 장면이 슬펐더랬다... Made you cry? 내 직선 화법에 져준다는 듯 almost 라며 멋쩍어했다.
우리는 일본 아줌마들의 한류사랑, 한국의 성형문화에 대해서도 논했다. 일본인 아내를 둔 크리스는 온화한 성격의, 함께 잡담하기 좋은 상대이다. 일본 열도에 때늦은 미투(비슷한) 열풍이 일고 있다고도 했다. 쟈니라는 아이돌 거물이 있었는데 그가 죽자 폭로된 (이미 유명한) 스캔들로 열도가 뒤집어졌다고. 남자 어른이 남자애들을 어쨌다고? 오징어 게임, 아니 어떤 영화보다 경악할 현실판 호러가 아닌가.
미투 없는 나라 일본에 수많은 미투가 숨어 살거라, 그렇게 사는 게 답이리라, 침묵하던 차 결국 대형으로 뽀록이 나고 말았다. 터진 김에 연이어 터지지 않는 일본 사회에 복장이 터지는 건 나뿐이 아닐 테고. 국민성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듯, 끝내주게 잼나고 화끈한 한국영화에 비해 일본영화는 잔잔히 흐르는 맹물 같다. (맹물 같은 영화를 즐겨 보진 않지만 잔잔한 감동이 일 때가 없진 않다.)
저녁시간, 얼굴도 볼 겸 한국 영화제에 가자고 조샘이 제안했다. 작년에 셋이서 영화 본 게 생각난다며.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 재밌게 봤잖아요 라며 정샘도 반겼다. 우리는 월요일에 만나 저녁을 먹고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관람하기로 했다. 옛날 생각날 것 같은 우리 감성이 있을 듯 ㅎ. 조샘이 고른 작품이다. 우리 감성을 대중문화로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오랜 인연. 한국어교사를 하며 만난, 언니 또래 그들과는 서로 선생님이라 호칭한다. 존댓말이 불필요하고 언니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한번 때를 놓치면 그대로 굳어지는 것 같다. 미운 정 고운 정 허물없는 사이라도 좋은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존중해 주는 걸 느끼며 내가 멋진 성인이 된 기분이 들게 해주는 쌤들이다.
학교와 집만 오가는 현재 나의 모습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이다. 헤어스타일링, 메이크업은 커녕 스킨케어도 제대로 안 하고 거울이 붙은 세면대 앞에 설 때가 아니면 내 얼굴을 보는 일이 없어졌다. 늦바람인지 책바람이 나서 다른 것엔 마냥 인색해지고 말았다. 위로가 되는 건 그들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 위로가 되지 않는 건 그들은 제법 패셔니스타라는 것이다. 흠.. 내 모습이 어떻든 만나면 각자의 달라진 모습이 비칠 것이다. 시티에 가면 주차 잘하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오면 될 일이다. 자의식은 집어던지고 만남과 영화에 올인하자.
한국 영화제가 열리는 페더레이션 스퀘어. 그곳에 가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장소가 영화까지 럭셔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