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두화, 라일락, 아이리스, 사과꽃이 돌아오는 시월, 대책 없이 비대해진 두 덩이의 디오스마에 핑크 별꽃이 밤하늘보다 총총할 때 영과 원이 놀러 왔다. 오래 기다린 초대. 앞 뒤뜰이 제멋대로라 하니 원은 정원 검사 안 한다고 키득됐었다. 내 집은 제멋대로인 나를 안팎으로 닮아가는 중이다.
정원에 진심이던 때가 불과 이태 전. 단골집 드나들듯 버닝스를 오가며 기계와 도구를 사 쟁이고 깻잎씨 쑥씨를 얻어 모종을 심고 뒤뜰엔 담장을 덮어줄 자스민을, 자색 사루비아를, 홍시 감나무를 심었더랬다. 누가 잠들면 타인이라 했던가. 애기 식물들을 혼자 크게 놔두고 변심한 애인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다른 것에 열중했다. 가물에 콩 나듯 호스 물을 뒤집어쓰다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식물들이여. 하늘이 내린 빗물만으로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준 보살님 같은 아카시아와 다프네가 없었다면..
예고 없이 노고 없이 (전 주인 덕분에 사시사철) 꽃을 보게 되는 일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하나의 꽃밭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과 마음과 노력이 한데 모인 결과인 것을. 손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미니멀한 정원이라도 어루만지는 손길 없이는 꽃을 볼 수 없다. 도착하자마자 원은 핸드폰에 꽃사과나무부터 수집했다.
잔디라기 보단 오솔길 같은 장발의 뒤뜰을 목격하고선 식탁에서 아늑한 뜰이 보인다느니, 적당히 좋은 사이즈라느니, 그들의 말은 예쁘고 미니멀했다.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미니멀리즘처럼.
원이 사 온 샴페인 로제에 아보카도 스무디를 곁들이며 얘기를 하는 동안, 오븐에 연어를 굽고 파스타와 황태국을 끓였다. 미니멀할지라도 손님을 앞에 두고 하는 요리가 그렇기 마련이다. 미리 끓여 받쳐논 파스타 면발은 뿔었고 국 간은 싱거웠고 소스 없이 구운 연어 위엔 라임조각을 쥐어짰다. 살림꾼이라 보이는 것도 많았을 텐데 말을 아끼던 영도 음식 앞에선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터. 우러난 국물에 오동통이 된 황태가 씹을 만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함께 저녁을 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쁜 건 미니멀하고 미니멀한 건 예쁘다.
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예쁜 건 너무나 많다. 먹고 마시는데도 우리는 예쁨을 추구한다. 예뻐서 산 찻잔, 술잔, 접시, 쟁반.. 예쁨은 새로움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새로 구입한 건 거의 확실히 예전 것보다 예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임은 그릇들의 잔치이기도 했다. 항아리처럼 생긴 찻잔이 맘에 들어 세트로 함께 구입한 디너웨어를 내놓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모자란 음식맛을 커버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내 찬장엔 한 번도 쓰지 않고 뒤로 밀린 것들과 버리지 못해 안고사는 것들이 요리조리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요런 저런 것이 눈에 들면 원은 속에 담지 않고 하나하나 감탄해 마지않았다. 미니멀리스트 원이 심미안을 가진 건 축복일지 딜레마일지. (원의 찬장은 맥시멀에 가까울지 모른다). 현실과 이상은 다른 거니까. 이쁨은 나눌수록 기쁜 거니까, 2년 전 사서 쟁인 러브 쟁반을 선사했다. 깜짝 선물에 쟁반같이 둥근 얼굴이 되어서도 입을 모아 미래는 미니멀이라며 어렵더라도 미니멀하자는 다짐을 이어갔다. 바리바리 사서 쟁일 때는 언제고 바야흐로 버리거나 남 주기 바쁠 시대가 도래했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항아리 잔에 담긴 커피와 차를 물 한 바가지 들이켜듯 남김없이 음미하고서 기차 시간에 맞춰 그들은 일어났다. 시티에서 갈아타고 귀가하려면 이미 이른 시각이 아니었다. 도시의 동서남쪽에 각자 거주하다 보니 운전보다는 기차 여행이 맘 편하다. 다른 한 친구는 찐 친구라 갈 수 있는 거리라며 부러운 듯 이번에 못 오는 핑계를 댔었다.
10시 넘어 귀가 알림이 동시에 들려왔다. 오늘 둘의 출발 도착시간이 똑 맞아떨어졌다. 이제 녹차 한잔한다며 원이 러브 쟁반 위에 앤티크 엄마 찻잔을 띄웠다. 나도 인증샷이라며 영은 하트 같은 핑크 찻잔에 보리차를. 찻잔 열전이라면 나도 해보자고 흰 빈티지 찻잔에 마시지도 않을 말차를 풀었다. 찻잔의 이쁨은 차고 넘쳤다. 한밤의 찻잔 경합이라니. 역시 채우고 볼 일이다. 급한 대로 미니멀은 찬장 안에 넣어두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