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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맛

by 승진


4교시가 끝나갈 무렵 교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2학년 영서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들을 멍하니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교실 밖은 어느덧 우산을 가지고 온 부모들의 소리로 북적거렸다. 저마다 고개를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눈으로 바쁘게 자기 아이를 찾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복도 여기저기에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엄마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들의 소리도 들렸다. 영서는 서랍 속의 책과 공책을 한 권씩 꺼내어 천천히 가방 안에 넣고 필통 속의 연필도 하나씩 키를 맞춰 다시 정리해 넣었다.
“영서 아무도 안 오시니?” 선생님이 영서를 보고 물었다. 이제 교실엔 영서와 선생님 둘뿐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영서가 고개를 숙인 채 희미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으니까 좀 더 기다려보자.”
영서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 같아 말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영서는 나타나야 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교실 뒷문으로 나가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서 있었다.
순간 빗물로 얼룩진 복도 끝에서 우산을 들고 허겁지겁 뛰어 오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영서가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교실에 있던 선생님이 한걸음에 복도로 달려 나오셨다.
“영서야. 엄마 오셨니?”
순간 영서가 복잡한 얼굴로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아, 우리 엄만 줄 알았어요.”
영서는 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선생님의 들뜬 표정이 한순간 실망으로 변하는 걸 보는 것이 더 부끄럽고 괴로웠다. 영서는 선생님이 빌려주신 우산을 들고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운동장에는 빗속을 천천히 나는 새들만이 보일 뿐 아무도 없었다. 구름이 짙게 낀 하늘 아래 새들이 무리 지어 낮게 날고 있었다. 빗물이 우산을 타고 영서의 작은 등 뒤에 매달린 책가방 위로 툭 툭 떨어졌다.

영서의 엄마가 집을 나간 건 2주 전쯤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없어진 건 이번이 두 번째였고, 그때마다 아빠는 엄마가 시골 이모 집에 급한 일을 보러 갔다고 했다. 영서는 밤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기다리다 혼자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잠이 든 날은 아침에 쓰린 속을 물로 채우곤 했는데 영서는 그것이 배고픔 때문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영서가 사는 동네는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다. 좁은 골목들이 연결되어 결국 어느 길로 가던 모든 길이 만나게 되어 있는 미로 같은 동네였다. 영서는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두고 골목을 빙빙 돌아 한참을 걸었다. 가방 속 필통 소리가 성가시게 달그락거렸고, 운동화 속에는 빗물이 가득 차 불쾌하게 질퍽거렸다.

우산 하나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골목길 끝에 영서의 집이 있었다. 어둑해진 골목길을 걸을 때면 뒤에서 누군가 쫒아오는 것만 같아 어린 영서는 한걸음에 대문 안까지 뛰어 들어가곤 했다. 까치발을 한 영서가 창문틀에 숨겨놓은 열쇠를 능숙하게 꺼내어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익숙한 신발이 보였다.
“할머니?”
“아이고, 내 새끼”
영서는 할머니를 보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영서는 푹신한 할머니의 품 안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는 비에 젖어 무거워진 영서의 가방을 받아 들고 주름진 손으로 영서의 보드라운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 냈다. 할머니의 눈가에도 작은 방울들이 안타깝게 맺혔다.
“불쌍한 내 새끼. 배고프지? 할미가 카레 해 놨다.”
할머니는 해방 전까지 할아버지와 일본에 건너가 사신 탓에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카레 등의 음식들을 종종 만들어주셨다. 할머니 집에 가면 먹을 수 있는 특식 같은 거였다. 일본어는 능숙하셨지만 한글은 읽고 쓸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할머니의 음식들 속에는 할머니만의 언어가 듬뿍 담겨 있는 듯했다. 하얀 밥 위에 얹어진 카레 위로 노란 김이 모락모락 꽃처럼 피어올랐다. 할머니가 호호 입김을 불자 노란 꽃이 춤을 추며 영서의 작은 입안으로 사라졌다.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과 사랑이 영서의 입속에서 마음으로 고스란히 이어져갔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영서가 말했다.
“할머니, 내일 나 깰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돼. 절대로. 알았지?” 할머니의 무릎을 꼭 감싸 안은 영서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숟가락을 대면 금세 푹 하고 으깨어지는 카레 속 감자처럼, 몽글거렸던 영서의 오늘 하루도 집안 가득 남아있는 카레향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두워진 창 밖에는 빗소리가 토닥토닥 들려오고 작은 가로등이 영서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