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by 승진


문을 열자마자 앞치마를 두른 몇몇 상인들이 잔돈을 바꾸러 들어왔다. 나는 ATM기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봉투를 채워 넣었다. 밖에는 다양한 크기의 트럭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장 곳곳엔 어린아이 키만 한 붉은 양파 자루들과 과일, 야채 상자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뽀얀 알타리들도 부채꼴 모양으로 예쁘게 묶인 채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정수기의 물을 내 텀블러에 마저 따르고 물통을 바꿔 끼웠다. 바닥에서 커다란 물통을 들어 올릴 때는 나도 모르게 ‘으챠’ 하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이런 날은 행원들의 컨디션을 두루 살펴가며 고객들이 길어진 대기 시간에 언성을 높이지 않도록 유연하게 컨트롤하는 것이 나의 중요 임무였다. 단순 업무들은 창구보단 되도록 자동화 기기쪽에서 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중간중간 바닥에 떨어진 명세서들을 치우며 은행을 크게 한 번씩 둘러보았다.
그때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아기를 업은 채 은행 안으로 들어오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얼른 문을 잡아주고 한 손으론 장바구니 하나를 받아 들며 대기표를 뽑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아기는 엄마의 등 뒤에서 엄지손가락을 빨며 곤히 잠들어 있었고 아주머니의 티셔츠가 아기의 침으로 지도를 그린 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아기 엄마 뒤를 바짝 쫓아 들어오려다 나를 보고 멈칫하는 노숙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근처에는 고정적으로 보이는 노숙자들이 대여섯 명쯤 있었는데 살이 나간 우산을 피고 누워 있는 그들 옆에는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여름 장마철에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심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마음씨 좋은 상인들은 이따금씩 무른 과일 같은 것 들을 주기도 했는데 자꾸 그런 걸 주면 여기에 더 진을 친다고 나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장 앞에는 현금을 노리는 소매치기들도 많아 수상한 사람들을 늘 경계, 관찰하고 노숙자나 잡상인들이 은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업무 또한 나에게 배정된 중요 업무였다. 제복을 입고 가스총을 허리에 찬 채 은행 셔터를 드르륵 올릴 때면 뭔지 모를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들이 어깨 위에 마구 느껴지기도 했다.
노숙자는 한쪽 끈이 떨어진 지저분한 쇼핑백을 들고 신발 대신 비닐봉지를 발에 싸맨 채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뒤로는 문밖에 서서 눈치만 살피며 은행 안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가 은행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지 바짝 긴장을 한 채 문 밖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볼 일을 마친 손님들은 노숙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연체동물들처럼 스르륵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 엄마가 창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출입구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장 뒤를 따라 들어올 때 했던 것처럼 문을 잡아주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때 그 노숙자가 기다렸단 듯이 아기 엄마 쪽으로 다가섰다. 나는 순간 아기 엄마와 노숙자 사이를 막아서며 “무슨 일이시죠?”라고 노숙자를 향해 말했다. 아기 엄마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노숙자는 흐릿한 눈동자로 입을 살짝 씩만 벌린 채 말했다.
“신발. 애기 신발. 내가 만지면 더러울까 봐.”
그러고 보니 잠든 아기의 포동포동한 한쪽 발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게 보였다. 노숙자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병아리가 그려진 아기의 신발 한쪽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자기의 몸이 더러워 아기의 신발을 만질 수도 주워 줄 수도 없다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얼른 떨어진 신발을 주어 와 아기의 발에 신겨 주었다. 노숙자는 엄마의 등 뒤에 업힌 아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잠든 아기를 눈으로 쓰다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은행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책상 아래 검은 홍시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은행 단골 고객이신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주고 가신 거였다. 나는 봉지 안에서 제일 크고 깨끗한 것을 하나 고르다 이내 봉지 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 책상 서랍에서 플라스틱 재질로 된 은행 쇼핑백 하나를 챙겨 밖으로 달려 나갔다. 쇼핑백을 질질 끌고 느린 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는 그 노숙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달려가 홍시 봉지와 은행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내밀며 말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노숙자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들을 받아 들곤 구부정한 허리를 살짝 숙이며 작은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발을 싸고 있는 봉지에서 힘겨운 비닐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작은 잠자리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란 하늘은 잠자리에게도 나에게도 공평하게 빛나고 있었고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가슴을 지나는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