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턱에 마스크를 걸친 채로 두 손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 같았다. 노인은 흔들리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쓸어내렸고 한 번씩 입가를 닦는 시늉을 했다. 발병 이전의 버릇인지 치매로 생긴 행동인지는 알 수 없다. 구십이 가까운 할머니의 얼굴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만든 파도가 쉼 없이 일었고 할머니의 손은 끝없이 춤을 췄다.
몸에 열이 많다며 11월 중순 쌀쌀한 날씨에도 여름옷을 입은 할머니는 한쪽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올렸다. 옆에 있던 노인이 혀를 찼지만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가슴 앞섬 지퍼까지 아래로 내린 채였다.
"어휴! 나는 더위를 많이 타서 안 춥다니 그러네."
그런 할머니를 보던 다른 노인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 놈들이 제일 무섭지. 얼마나 악독했는지 몰라."
건너편 아래쪽으로 보이는 추수 끝난 논에 시선이 멈춘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공출이라고 일본군이 쌀을 뺏어갔는데, 글쎄 이놈들이 그 양을 미리 알아보려고 봄에 모내기할 때 논에 와보는 거야. 그렇게 지들 눈으로 얼마간의 수확량을 마음대로 책정해두고는 가을걷이가 끝나서 예상량보다 적으면, 거! 대나무 있지? 그걸 요리 뾰족하게 해서 공출된 짚단을 푹푹 찔러보는 거야."
할머니의 마른 두 손이 길고 날카로운 대나무처럼 손끝을 세웠다.
"아니, 왜요?"
"왜긴, 짚단을 찔러서 대나무에 붙어 나오는 쌀이 쭉정이면 난리가 나는 거지. 그 예리한 대나무로 사람들을 찔러댔어. 다들 먹고살기 힘든 때라 제대로 공출 양을 채우지 못한 농민들이 쌀알이 안 붙은 짚단을 속에 숨겨서 낼 때가 있었거든. 그렇게 그놈들이 악랄했다고, 에휴! 못된 놈들."
옆에 앉은 다른 노인이 말을 보탰다.
"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전쟁이 났어예. 학교는 군인에게 뺏기고 우리는 길에서 공부를 했다 아님니꺼. 그때 마산시가 텅텅 비었다니까예."
그러든가 말든가, 할머니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남편 오른쪽 팔에 묵진한 게 떨어졌다 하데. 폭탄 파편이 박힌 거라. 앞서 가던 부하 옷을 찢어서 지혈을 했다고 하데. 남편이 그 부하 총을 뺏어서 앞세우고 길을 걸었데. 부상병이 걸리적거리면 막 죽여버리고 그랬다고 하면서."
"예? 부상병을 책임져야 전우죠. 막 죽이다니요?"
마산에서 살았다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그기 내 살기 위해 그랬다는 거 아님니꺼? 전쟁터에서 부상당하면 막 죽이고 그랬다 아님니꺼."
"그럼, 암! 그렇지. 그랬다고 하더만."
모처럼 두 분의 대화가 연결이 되었다.
할머니는 건빵 한 봉지로 하루를 살았다고 했다. '물 먹고 감빵 먹고, 감빵 먹고 물 먹고'라며.
할머니는 제일 먹기 싫었던 게 눌린 보리쌀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보리밥 정식을 별미로 찾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서 보리를 납작하게 눌린 후 물을 넣고 걸쭉하게 끓여낸 밥이 맛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무 밑에 숨으면 살 줄 알고 숨었다가 죽고, 땅굴 파면 살 줄 알고 들어갔다 죽고, 이리저리 많이도 죽었지. 거, 대포소리가 굉장하데. 대포는 밤에만 터졌어."
하지만 할머니는 대포소리보다 비행기가 더 무서웠다며 말을 이었다. 비행기 날개 밑에 달린 동그란 무기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선풍기만 봐도 그 생각이 나서 지금까지 선풍기를 틀지 못한다고 한다.
"북한군들이 많이 죽인 거죠?"
"아니라, 인민군들이 한국 사람 집으로 많이 오기는 했어. 그 사람들은 먹는 걸 그리 좋아하더라고. 그래도 해코지는 안 했어. 미국 놈들이 그랬지. 괴롭히는 일도 많았고 도와주기도 많이 했고, 그 시절엔 양공주들도 많았잖아."
할머니의 남편은 충남 어딘가, 국군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자주는 아니고 몇 년에 한 번쯤 다녀오신다는데 할머니의 시선은 남달랐다, 그렇게 내가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장군들 묘도 있데. 장군들은 묘도 달라. 계단처럼 만들어서 맨 위쪽에 있더라고. 남편은 그 아래 묻혔지. 많이들 죽었어. 가보면."
할머니는 남편의 연금으로 살아간다. 뭐, 월세를 받는 집도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주 엉뚱한 행동을 하시고 그만큼이나 자주 똑 부러지는 말씀을 하신다.
인생이라는 것 별 거 없다는 할머니다. 돈이 최고라는 할머니다. 그래도 건강해야 돈이 의미가 있다는 할머니는 치매 초기다.
걸을 때 비틀거리고 침을 흘리고 초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다니는 할머니는, 도화지에 색칠을 할 때면 장미는 분홍, 국화는 노랑, 하늘은 파랑, 나무는 초록색깔로 정확하게 교육된 색감으로 색연필을 잘 골라내시고 함께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노인들에게 아침은 꼭 먹고 다니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자신은 아침을 먹지 않는 듯했다.
"8남매인데, 아들이 여섯, 딸이 두울."
"지는 네 명입니더, 아들 둘에 딸 둘이라 예."
"저는 아들 하나에 딸 둘, 저는 아들 셋에 딸 하나....."
어르신들 대화가 평소와 달랐다. 보통은 일제강점기나 전쟁, 지난 이야기의 도돌이표였는데, 오늘은 자녀들 몇을 어떤 비율, 그러니까 아들은 몇, 딸은 몇 명인지가 주제였다.
가만히 다른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 딸이 많아야 비행기를 타."
나는 그 말뜻을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에?"
할머니는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표정은 무척 상기된 모습이었다.
"첫째 딸은 발리, 둘째는 일본 온천, 셋째는 장가계......"
뒤죽박죽 할머니의 기억을 듣다 보니 '딸이 많아야 비행기를 탄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이고, 여태까지 어머니에게 비행기를 태워드린 적이 없고, 그러니까 말로만 많이 해드렸고, 딸인 누나는 자주 어머니에게 비행기를 태워드렸으니, 역시 할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은 모쪼록 건강하실 때 함께 여행할 수 있기를, 딸이든 아들이든지 간에,라고 끝내려고 했는데, 아! 코로나 19 시대 아니던가, 여행은 어려울 테니.
부모님께, 당장 비행기는 어려워도 자주 전화는 드리자고, 아들이든 딸이든지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