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내 인생의 순백의 시절, (그런 때가 있기는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칠월의 어느 밤이었다.
이십 대의 사회 초년생은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환한 미래를 꿈꾸며 전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그곳은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높은 건물의 맨 아래층이었다. 넓은 유리창 너머, 어딘가를 향하는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의 눈빛이 초조했다. 모니터에 박히는 글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자꾸만 시선이 손목에 두른 시계를 향했다. 그 탓에 글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급한 마음에 실수 연발이었다. 심호흡이라도 할 요량으로 두 팔을 위로 쭉 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그때 사무실 현관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기다리다 지친 그녀가 온 건가?'
얼굴이 자연스럽게 입구를 향했다. 거기에는 내가 기대한 그녀보다 두 배는 작고 네 배는 나이 들어 보이는 웬 할머니 한 분이 서있었다. 주위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길을 가던 할머니가 이곳을 방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열대야가 극성을 부리던 여름밤이었다. 이 날씨에도 추위를 느끼시는 걸까. 할머니의 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흰색 보자기를 삼각으로 접어 머리 위에서부터 두 귀를 감싸고 내린 후 턱 아래에서 동여맨 얼굴에는 주름살이 동굴에 흐르는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었다. 영화에서 본 조폭들의 90도 인사보다 더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자세로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 모습이었다. 늘어뜨린 두 팔에는 검은색 보자기로 야무지게 싼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께 다가섰다. 그때 주름 속에 숨어 있던 할머니의 눈동자가 드러나며 반짝 빛을 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 TV 프로그램, 주말의 명화에서 본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영화, 'COMMANDO'에 나온 M60 기관총처럼 할머니의 입에서 이상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아들내미 집 갈라켔는데
서울이 온 캉 널버서 도저히 몬 찾겠네.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갑까지 이자쁫다 아이가.
한차믈 걷다 보이 여가 불이 비이길래 잘대따카고 와보이
셈이 울 아하고 우찌나 닮았는지 고마 끔뻑 놀래자빠지뿌따.
하필 아들내미가 내일 집에 엄따케서
도로 내리 가야 할 낀데
지갑을 이자뿌서 돈도 엄꼬
글타고 걍 달라할 수도 엄네.
우리 아 줄라꼬 가꼬 온 토종꿀을
아들내미 같은 셈이 이거 쫌 사주믄 안 되겠능교?
여 보믄 밑에 허연 거 있는 기. 마 진짜 배긴데
아들내미 대신 가져가고 차비 좀 안 줄란 교?
원치 30만 원 넘게 파는 긴데 고마 10만 원만 주이소. 차 빕 니더.
그래 해 주시소."
할머니는 숨도 쉬지 않고 길고 이상한 말을 끝냈다. 잠시 보였던 눈빛이 거북이 뚜껑 속으로 숨듯 흘러내린 눈두덩 사이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처음보다 머리를 바닥에 더 떨어뜨린 채 말도 없이 그 자리에 꿈적도 않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차비가 없으시다는 거네요. 그럼 제가 그냥 차비드릴게요. 꿀은 됐으니까 나중에 아드님 드리세요. 아드님 못 뵙고 가서 어떡해요."
가지고 있던 현금이 부족해서 건물 로비에 있는 '나이스' 현금 인출기에서 유쾌한 마음으로 차비를 내어드렸다. 연신 고맙다며 끝내 내미는 할머니의 손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꿀을 감사하게 받았다. 혹여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극진히 보내드리고 검은 보자기로 꽁꽁 숨긴 흐뭇한 토종꿀을 소중하게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여자 친구에게 향했다.
"맹한 거니? 그렇게 순진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겠어?"
고개를 숙였다.(그래, 나 맹한 거 맞다.)
"쯧쯧쯧, 어떻게 그런 쉬운 사기에 걸려들 수 있어? 우리 미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고개를 더 아래로 숙였다.(사기 친 사람이 잘못이지. 그렇다고 미래 까지라니....)
그때야 뭔가 쏙쏙 귀에 들어오던 어설픈, 표준말이 섞인 할머니의 사투리가 생각났다.
토종꿀이라던 옅은 밤색의 유리병은 흑설탕을 잔뜩 넣은 진짜 달달한 물로 판명되었고 내게는 맹하고 바보 같다는 낙인 하나가 또 추가됐다. 속이는 것보다야 속는 것이 나은 것 아니냐고 자위해 보던 그날, 지울 수 없는 씁쓸한 마음에 한숨만 나오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이듬해 여름, 어느 밤)
신입사원일 때는 아는 게 없어서 야근을 하고 이년 차 직장인은 제법 아는 게 많아서 야근을 한다. 나와의 미래를 의심하던 여자 친구는 그날도 나를 기다렸다. 날은 후텁지근했고 의자에 앉은 몸과 달리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나 약속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삼각지 같은 밤이었다.
모니터에는 익숙한 글자들이 빠르고 안정감 있게 지나갔다. 드디어 문서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마무리된 보고서를 출력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얼얼한 두 팔을 귀 옆에 바짝 붙이고 기지개를 켰다. '이제 끝이다.'
그때 사무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원치 않은 곁눈질을 하며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여름,
밤에 가까운 늦은 저녁,
할머니는 흰 보자기를 머리에 둘렀다. 잔뜩 굽은 허리에 손에는 검은 천으로 싼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다. '데자뷔? 이건 기시감인가? 꿈인가?' 주의를 둘러봤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잠시 천정을 향한 두 눈을 따라 머릿속의 연산이 복잡해진다. 금세 결과가 나온다. 나는 1년 전의 기억을 벼락처럼 떠올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져온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상대가 연세 지긋한 할머니라는 사실보다 나를 속였던 범죄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도대체 왜 다시 나타난 건지는 미처 생각도 못했다. 이번엔 제대로 따져 물어야겠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바닥에 닿을 듯 떨구고 있던 할머니의 고개가 살며시 들렸다. 구부린 허리는 그래로 두고 이마만 들어 올린 모습이었다. 눈을 치켜뜨게 되는 자세였다. 주름에 가려 반쯤 보이는 작지만 매서운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할머니의 입에서 작년보다 더 이상해진 단어들이 쏟아졌다. 마치 'RAMBO' 영화에 등장한 소련제 PKM 기관총 같았다.
"긍께 나가 아들내미 집을 왔는디
서울 땅댕이가 어~치께나 넓은가 당최 이노무 것~ 찾을 수가 있으야제~
여그저그 비 맞은 달구 새끼마냥 올매나 댕겼는가 몰러~
근디, 글다가 혼이 쏙~빠지가꼬
그래 부렀는가 어쨌는가~
보께미에 들어앉어 있던 전대를 잃어버려 부렸어~
돈은 읎지~ 어찌 긋어~
나가 물팍도 쑤시는디 얼매나 돌아댕겼는가 몰러~
아~ 근디 딱~ 본께로 여그에 불이 켜 있드란 말이 시~~
오메~ 나는 인자 살었네~ 하고 일로 들왔는디~
딱~ 본께로~
얼라~~
선상님이 울 아들내미 하고
얼굴이 똑 탁혔네~
나가 가슴 팩에 짱돌 맞은디끼 놀래부렀어~~~
근디 울 아들이 내일은 집에 없다고 안 허요~
벨 수 있간디~
집으로 그냥 가야 쓰는디 전대는 잃어 부렸고 돈이 있으야제~
그서 말인디~ 울 아들 줄라꼬 가꼬온 이 꿀을 처분혀서~ 차비 쪼매 혀야 쓸랑게벼~
뭇도 모르는 것들이 꿀 밑에 허연 거~ 가라앉았다고 가짜라꼬 쌌는디~
그것이 진짜 랑게~ 가짜는 어디 그란 것이 생기 간디~
긍게 선상님이 이것 좀 사가지 갈랑가?
나가 말이여~
이것을 지대로 팔믄사 30만 원은 일 없이 받는당게~
근디 선상님 한티 기냥 10만 원에 줄란 디~ 어찐가?
울 아들내미 줬다 쳐 불고~ 생각하고 말랑게~
내사 뻐스비만 나오믄 댄게~
워쪄~~ 그랄려?"
할머니는 뭔가 할 일을 끝마치고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굽은 허리에 붙이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저번과 똑같은 상황인데 할머니의 사투리가 바뀐 걸 느낀 것이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하지만 그날은 꼭 한 마디를 하리라 다짐했다. 짐짓 비장을 표정을 짓고 할머니를 노려봤다.
"할머니! 기억 안 나세요? 작년 딱 이맘때요. 제게 뭘 파셨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판 그 토종꿀 아니 그 설탕물 조금도 줄지 않고 제 책상 밑에 있어요. 제 여자 친구가 두고두고 기억하며 세상을 배우라고 버리지도 못하게 했어요."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다. 용기가 생긴 나는 좀 더 결정적인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바로 그때, 나는 기적을 목격했다.
할렐루야!
할머니의 반쯤 접힌 허리가 일자로 쭉 펴졌다. 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는 할머니는 허름한 점퍼 안쪽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들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한결 팽팽해진 얼굴을 찡그렸다. 무언가 착오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봤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에잇, 이년 동안이나 승진도 못하고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어떡해. 요즘 젊은것들이란... 쯧쯧쯧..."
동그란 눈을 뜨고 멍하니 서있던 나는 한참 지나서야 할머니가 사라진 문을 향해 소리쳤다.
"저, 승진했다고요. 이제, 주임이라고요."
88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여전히 길은 정체 중이었다. 옆 차선에 선 자동차 창문이 내려지고 운전자가 뭐라고 말을 했다. 길을 묻는 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선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간절함도 묻어있었다. 도로의 소음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여의도쯤을 지날 때 차를 정차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선하게 생기고 환한 웃음을 지닌 뭔가 간절한 표정의 청년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수산물을 어시장에 납품하는 일을 하는데 차가 너무 막혀 그만 납품 시간을 넘겨버렸다는 것, 이 수산물은 아무리 물건이 싱싱해도 납품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납품을 못하게 된다는 것, 아주 싼 값에 즉 자신이 돌아갈 기름값 정도만 받고 비싼 자연산 돔을 팔기를 원한다는 것, 돕는 셈 치고 물고기를 사주면 자신은 물론 내게도 큰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스티로폼 박스를 열어 확인도 해 주었는데 정말 싱싱한 돔으로 추정되는 큰 물고기가 펄떡이고 있었다.(나는 지금도 자연산 돔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동생 같은 젊은 청년을 돕은 일이고 거기다 자연산 회를 저녁으로 먹을 수 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자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왜 사니?"
"........"
"정말 바보 아니니?"
"........."
자연산 돔이 들어있어야 할 사각의 흰색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미역이 잔뜩 들어있었다. 먹을 수도 없는.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속은 적이 있지만 세월이 쌓이면서 점점 속아 넘어가지 않게 된다. 조금씩 약아졌을 테지. 요즘은 누군가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면 '무슨 속셈이지?'라는 의심부터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 겁부터 내는 모습에 조금은 슬픈 마음이다. 조금 손해를 봤지만 그때의 피해가 크게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를 떠올리며 가끔 웃을 수 있으니까, 순백의 시절에 속임을 당했던 일들이 지금 내게 글감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어쩌면 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