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 불편해서 사라진 것이 당연해 보인다. 옛 기술은 새로운 방법이 생기며 도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다시 생각나는 것도 있다. 물론 사라졌거나 잊힌 옛 것들 자체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불편하기만 했던 그것에 스며있는 기억들을, 당시의 풍경이라든지 친구라든지 혹은 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내 어린 날의 단체 건강 검진이 가끔 그리워지는 이유다.
1980년대는 안이나 밖으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많았다. 우주적으로도.
대한민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전두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가 발사되고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을 치른다. 미국의 우주선 챌리저호가 폭발하고 소련에서는 원자력발전소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한다.(위키백과)
그러던가 말던가 나의 1980년대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후배를 맞이했고 '남해'라는 섬에서 나의 플란다스의 개 '잭키'와 함께 육(산과 들), 해(갯벌과 바다), 공(나무 위)을 가리지 않고 뛰어놀던 나만의 세상에 몰입하던 때였다. 길을 가다가 애국가가 나오면 그대로 멈춰서 가슴에 손을 올리는 어른들은 모두 독립투사 같았지만 내게는 그조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정도의 놀이로만 보였다.
교실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지지배배 떠들고 있었다. 지금 초등학교와는 달리 그때의 국민학교 한 반의 학생 수는 거의 60명 정도였다.(아마 그런 것 같다.) 교실 왼편은 여자아이들이, 오른편은 남자아이들이 동과 서로 나뉘어 가운데 통로를 비무장 지대 삼아 대치중이었다. 여자아이들의 머리는 대부분 귀밑 끝선에 맞춘 단발머리였고 남자아이들은 모두 바가지 하나씩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간혹 먼 산에서 내려와 헝겊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집 앞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다 돌아가는 스님 같은 녀석도 있긴 했다. 나 역시 바가지 한 개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우리 집 바가지는 지붕에 달린 하얀 박을 잘라서 만들었는데 한쪽 면이 조금 올라간 비뚤비뚤한 바가지였다. 할머니가 박을 반으로 자를 때 비뚤 하게 잘린 것이다. 당연히 내 머리도 삐뚤 했다. 처음엔 왼쪽 머리카락이 오른쪽에 비해 짧게 잘렸다. 그럼 할머니는 재차 가위를 들었다. 그러면 이번엔 왼쪽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졌다. 나는 또 가위를 드는 할머니를 말려야 했다. '무조건 마음에 든다'라고 소리쳤다. 스님이 될 수는 없었다.
처마 밑 제비 새끼 같은 아이들의 짹짹거림은 교실 앞문이 열리자 일순 입을 다물었다. 긴 막대기를 까딱거리며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섰다. 선생님 손에는 큰 누런 봉투가 들려있었다. 선생님은 큰 누런 봉투에서 손바닥 크기의 작은 누런 봉투를 꺼내기 시작했다. 슬쩍 미소까지 짓는 모습이었다. 나는 동그란 눈으로 턱을 치켜들고 교탁 위에 놓인 봉투에 시선을 집중했다. 작은 봉투가 가져올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선생님의 엄한 당부가 이어졌다. 봉투를 부모님께 드리고 전원 내일까지 대변 한 조각을 봉투에 얌전하게 넣어서 오라는 것이었다. 서쪽 나라의 국민들은 얼굴을 붉혔고 동쪽 나라에서는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선생님의 만능 봉이 큰 소리를 내며 교탁에 떨어졌다. 짧고 단단해 보이는 막대기를 아이들은 만능 봉이라 불렀다.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손이나 발바닥을 때리는 회초리로, 졸고 있는 녀석들을 깨우는 자명종으로, 칠판에 적힌 글씨를 짚어주는 지시봉 등으로 그때마다 이름이 바뀌는 막대기였다. 만능봉은 이번엔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일순간 잠재웠다. 나는 조용히 누런 봉투를 가방에 넣고 금세 잊어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마루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요즘처럼 게임이나 장난감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몸에 검은 점이 빼곡하게 생긴 '잭키'가 마당에 엉덩이를 깔고 물끄러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모양으로 변하는 구름을 구경하는 일은 꽤 재미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때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곶감의 겉에 하얀 가루가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먹어도 될 만큼 익은 것 같았다.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무명실에 길게 연결된 곶감 한 줄을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 맛 만 볼 요량이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스무 개 정도 매달린 곶감 한 줄을 다 먹고 말았다.
가방에서 누런 봉투를 발견한 엄마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봉투는 당장 내일까지 채워야 했다. 낮에 먹은 곶감이 문제였다. 아무리 배에 힘을 주고 시간을 보내도 봉투를 채울 그것은 소식이 없었다. 엄마는 내일을 기다려보자며 나를 위로했지만 선생님의 만능봉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침이 왔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화장실(재래식 변소)을 들락거렸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아랫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허사였다. 만능봉에게 매타작 당할 일만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마당으로 나갔다. '잭키'가 달려와 반가운 척을 했다. 저리 가라고 녀석을 밀어냈다. 괜한 심술을 녀석에게 부렸다. 내 감정은 아랑곳없이 달려드는 '잭키'에게 서운한 생각이 들었을 때 마당 한 구석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만능봉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에서 자라는 치자나무 가지를 꺾었다. 누런 봉투가 두툼해졌다. 엄마에게 대변 체취가 성공했음을 알렸다. 엄마의 축하인사를 받고 학교로 향하는 길에 만난 '잭키'의 눈빛이 불안했다.
잭키는 누구보다 건강했다. 동네 개들 중에서도 제일 빨랐다. 그런 튼튼한 '잭키'였으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를 백 번도 넘게 되뇌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죄지은 자의 마음이 어떤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픈 아이처럼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와 할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이 나를 향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만있었다.
교탁에 부딪치는 만능봉의 소리가 온 교실을 흔들었다. 만능봉은 서슬 퍼런 회초리로 변했다. 선생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지만 어쩐지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서 미소를 띤 듯도 했다.
"니들 똥을 가져오랬지 누가 니들 집에 개똥을 주워 오랬냐? 거참... 사람 몸에서는 발견될 수도 없고 발견된 적도 없는 회충이 나왔단다. 그것도 많아도 너무 많이... 누군지 말 안 해도 스스로는 잘 알겠지? 이리 나오너라."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을 한번 감고 다시 한숨을 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아랫집 영철이도 마을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 집 아들, 정두도 상철이도 건넛마을 용식이까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 개똥을 누런 봉투에 담은 것이다.
"허허, 이놈들... 개똥 주워 온 놈들 몽땅 이리 나와!"
그날 선생님은 우리를 매타작 하지 않았다. 꿀밤 한 대씩을 맞았다. 선생님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모처럼 화합된 동과 서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우리는 얼굴을 붉은 당근처럼 하고선 머리를 숙였다. 영철이와 정두, 용식이와 상철, 그리고 나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졸지에 건강검진을 당하고 많아도 너무 많은 '기생충 보유 개'가 된 '잭키'는 흰 알약 몇 알을 억지로 삼켜야 했고 누런 봉투에 개똥을 담아간 우리들은 일주일간 학교를 돌아다니며 동네 개들이 두고 간 개똥을 주워야 했다. 다음 해에 다시 누런 봉투를 만났을 때 겉면 아래쪽에 선생님이 직접 쓴 문구가 추가됐다.
<동물 변을 넣지 말 것. 특히 개똥>
뿌연 안갯속에 먼 산처럼 가물거리던 기억들이 글을 쓰며 명료해진다. 아주 오래전 황당하기까지 한 기억을 떠올렸을 뿐인데 오늘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40대 후반을 지나면서 이런저런 세상의 때가 묻었을 테다. 어린 나를 불러내서 등을 내어준다. 손이 닿지 않은 등 가운데를, 오늘의 허전함을 녀석에게 맡긴다. 어쩐지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