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말아줘, 철근

by 고재욱

과거에는 건물을 철거할 때 전도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말 그대로 건물 아래쪽을 먼저 부수고 벽체나 기둥, 혹은 건물 전체를 한쪽 방향으로 넘어뜨리는 공법이었다. 굵은 나무 밑동을 톱으로 자르면 버티지 못하고 기우뚱 넘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벽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넘어지는 일이 많았고, 사고도 잦았다.

요즘은 건물을 철거할 때 압쇄공법을 사용한다. 민물가재 앞다리처럼 생긴 집게로 바닥, 벽체, 기둥을 위에서부터 조금씩 으깬다. 건물은 집게(회전식 크러셔)를 오므릴 때마다 1m나 2m 정도의 덩어리로 쪼개진다. 이 덩어리 속에는 굵은 철근이 얼키설키 박혀있는데, 폐기물을 현장밖으로 내보내려면 콘크리트와 철근을 분리해야 한다. 이때 또 다른 집게(고정식 크러셔)가 등장한다. 생긴 모습을 본떠 '하마'라고 부르기도 하고, 집게를 느리게 폈다가 모았다가 하는 모습이 우둔해 보인다며 '멍텅구리'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마는 하루종일 콘크리트 덩어리를 씹는다. 지켜보는 사람의 턱뼈까지 얼얼한 느낌이다. 이 작업을 고철말이라고 부른다. 나는 철거 공정 중에서 이 작업을 제일 좋아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왜일까?


안에 박혀서 콘크리트 덩어리를 붙잡아주는 일이 철근의 역할이다.

건물을 지을 때 이 철근을 가로, 세로 교차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다. 철근이 없다면 콘크리트는 금세 균열이 가고 무너질 것이다. 건물의 힘줄과 같다. 이 힘줄은 재활용이 가능하다. 폐콘크리트 역시 순환골재로 다시 돌아온다. 건물을 철거하더라도 덧없이 버려지는 건 없다. 집은 있을 때나 사라질 때나 참으로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쉼 없이 씹는다.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그러면 콘크리트 덩어리는 더 작은 조각으로 깨져서 후드득 떨어진다. 한 번 두 번 하마입이 움직일 때마다 콘크리트 속에 숨어있던 철근이 드러난다. 이 작업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백 번 반복한다. 마지막에는 철근만 남는다. 하지만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근일 뿐이다. 형태를 갖추지 못한 철근 뭉치다. 아직 쓸 수 없다. 멍텅구리는 이 철근을 꾹꾹 누르고, 접으며, 고철 수집차가 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만든다. 사각형 모양이다.

굴착기는 아주 느린 속도로 이 작업을 계속하는데, 30 ton이나 나가는 무게 때문에 더 더디게 느껴진다. 실제로 동작이 굼뜨기도 하고.

재활용 수거차가 한 번에 들 수 있는 800kg 정도의 고철뭉치가 한 개 완성되면, 하마는 다른 콘크리트 덩어리를 입에 물고 되새김질을 한다.

굴착기 한대가 만들 수 있는 고철뭉치는 하루에 12개 정도인데, 몇 개 오차범위는 있을 것이다.



오십 년 하고도 조금(무척 개인적인 기준) 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어째 갈수록 비워내는 것이 더 힘들다. 말로는 '비교하지 말자'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뒤쳐진 게 아닌가 조급해하는 마음이 든다. 머리와 따로 노는 심장에 화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마음이 다름 아닌 내 것이니 이를 어찌할까.

불순물을 떨궈내기까지 새김질은커녕 두어 번 시도에 팽개쳐버린 수많은 마음들이여. 못난 주인을 용서하시라.



겨우 콘크리트 덩어리를 떼어내고도 철근은 아직 볼썽사납다. 덩그러니 남은 철근의 제값을 받기 위해서는 수없는 다듬질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야 낡은 철근은 쇳물에 녹아 새 철근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느덧 100개가 넘는 철근뭉치가 쌓였다. 네모 반듯하게 만들었다.

붉은 땅과 파란 하늘 사이에 쌓아놓은 녹슨 철근더미가 귀로만 전해 들은 코끼리 무덤 같기도 하다.


콘크리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철근을 보는 일, 수없는 되새김 끝에 철근을 드러내는 일, 드러난 철근을 누르고 접고 굴려서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은 고달프기까지 한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더딜지라도 반드시 된다. 저 많은 철근뭉치처럼.

그런데 일이 잘 되기 위해서는 약간 혹은 매우 하늘의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현재 고철 가격이 반으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일을 멈출 수는 없다. 힘이 들 때는 푸시킨을 소환하자.

이런 일이 어찌 철근뿐이랴.



코끼리 무덤이 소란스럽다. 근처에 가보니 철근뭉치 속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웬 심보람! 돌멩이를 하나 던져본다. 주먹만 한 새들이 화악 날아오른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수백 마리다.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새 떼다.

나무를 전부 베어버린 탓에 졸지에 철거민이 된 새 떼가 철근 속에 집을 지었나 보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음속에 키우던 새 한 마리, 무덤 속에 몰래 두고 돌아선다.



설날입니다.

오늘은 모든 걱정근심 내려놓으시고 그저 즐거운 날로 지내시길,

혹여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봄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오늘만큼은 평안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원주에서

고재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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