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못 이야기

사랑은 남아서......

by 고재욱
호 불면 날아갈까 부서질까 그렇게 사랑을 줬지.


할머니는 자신의 오른팔을 툭툭 치셨어요. 평생 남편의 팔을 베고 잤다고 했지요. 중매로 결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에 할머니에게 첫눈에 반한 남편은 일 년을 할머니의 아버지에게 매달렸다고 해요. 할머니는 '절대 시집을 가지 않겠노라'라고 선언했지만 남편의 일 년 동안의 구애를 지켜보며 '삼일만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겠노라' 큰소리를 치며 시집을 셨대요. 할머니는 삼일이 지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삼일이 아니라 첫날부터 너무 행복했었다며 웃으셨어요.


밥 먹어, 뭐 해 등 말을 놓아본 적이 없었지.


두 분은 서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 와, 점잖으셨군요.

- 점잖다마다, 나는 잡수세요, 남편은 같이 먹읍시다. 그랬지.

-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뭐라 부르셨어요?


옥아, 옥아! 이리 불렀지.


할머니의 호적이름과는 달랐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꼭 옥이로 부르셨다고 해요. 할머니의 눈빛이 반짝였어요. 자주 허공에 멈췄던 초점 없는 눈이 아니었어요. 창백한 두 볼에 발그레 붉은색이 깃듭니다. 할머니는 아직도 사랑하는 중이신가 봐요.

by Olessya, pixabay.




-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돌아가셨어요?

-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셨어. 병원엘 갔지.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앞으로 난 골목길에서 쓰러지셨어. 그 길로 돌아가셨지. 남편의 나이 68세였어.

- 이십 년 전이네요. 갑자기 그렇게......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저는 상상도 안되네요.


처음엔 가슴에 구멍이 하나 뚫리고 대못 하나가 박혔다고 생각했어. 그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지. 못 하나가 박힌 건 맞지만 그 못은 고통을 주는 게 아니고 기쁨을 주는 사랑 못이란 걸 말이야.

- 네에? 가슴에 박힌 못이 어떻게 기쁨을 준다는 거예요?

- 남편이 내게 준 사랑이 두고두고 떠올랐거든. 그는 황망하게 떠났지만 그가 남긴 추억이 가슴에 떡하니 박혀서는 나를 살 수 있게 해 주더란 거지. 그때 알았지. 이별 후에도 사랑은 남아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가 퇴근을 조금 늦게 할 때면 할아버지는 집 앞 골목길 끝에 서 계셨다네요. 멀리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할아버지는 흠흠 헛기침을 하셨대요. 혹여 할머니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서요. 할아버지는 슬쩍 주위를 돌아보고는 할머니 어깨를 감싸 안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대요.

한 번은 첫아기가 뇌수막염에 걸렸다지 뭐예요. 할머니가 아기를 보살피다 쓰러지자 할아버지는 한 달을 아기 옆에서 간병을 했대요. 할머니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요. 근 70년 전인데 꽤 로맨틱한 남편이었죠.


by Ulleo, pixabay.


할머니의 기억은 여기까지예요. 호 불면으로 시작해서 가슴에 박힌 사랑 못 얘기를 지나 첫아기의 뇌수막염까지가 이야기의 끝이에요. 그러면 할머니는 다시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봐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할머니의 스토리는 다시 시작되죠. 손바닥 하나를 펼치고 호 불면서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요. 어떤 이들은 또 같은 얘기라며 지겨워하죠. 자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드릴 수 없어서 그렇지 저는 좋기만 해요. 들을 때마다 감동이에요. 매번 듣는 이야기인데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할머니의 가슴에 박힌 사랑 못이 뽑히지 않았으면 해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사랑 못 이야기 실컷 하시다가 하늘에서 남편과 만나면 그때 그 사랑 못, 남편이 뽑아주면 좋겠어요. 오늘도 아마 할머니의 이야기를 두어 번은 듣게 되겠지요. 전 또 감동하고 말 것 같아요. 사랑 못 이야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