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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이 영어 실력은 좀 늘었어요?

by Jade

한국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시댁 식구들을 만났을 때

형님이 대뜸 물었다.

“그래서 OO이 영어 실력은 좀 늘었어?”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총 9주간의 스쿨링에도 아들의 영어는 눈에 띄게 늘지 않았다. 형님은 분명 인풋이 어딘가에 쌓여 있을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사실 형님은 우리가 발리로 떠나기 일년 전부터 아이가일곱살이 되면 영유에 보내라고 여러 번 권유했다.

둘째 조카를 7세부터 영유에 보내고 초등학교 입학 후 유명 어학원에 보냈는데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엔 이미 영유 1년 보낼 돈으로 발리 세 달살기를 하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게 가성비면에선 제일 좋겠네요.”라는

애매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진짜 일 년 뒤에 영유 보낼 돈을 싸들고 발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래서 영유 1년 보낸 것 만큼 영어가 늘었을까?

전혀 아니다.

영어가 늘기는 했나 싶을만큼 미세한 변화도 포착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뇌세포 어딘가에는 쌓여 있을거라고 정신 승리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발리에서 9주나 학교에 다니면 그래도 영어는 좀 늘겠지라는 생각은 그저 순진한 기대일 뿐이었는지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고 리딩이 되는 상태에서 왔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간단한 인사도 잘 못하는 쌩초보 아이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최근에 아이가 영어로 ‘패딩턴’이라는 영화를 재밌게 보길래 호기심 반, 놀림 반으로 영어가 외계어처럼 들리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다. 한글 자막만 보고 있는 거 아니냐고. 아들이 살짝 발끈하며 말했다.

“외계어 아니거든. 가끔 들리는 단어들도 있어.”

그나마 귀에 있는 세포에는 영어 인풋이 좀 쌓였나 싶어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요즘 드라마에서 빠지면 섭섭한 타임슬립 능력이 있어서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발리 대신 영유를 선택했을까?

그럴리가.

아이 영어 학습만 생각했다면 애초에 발리에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발리에 가겠다는 건 순전히 나의 로망이었다.

아이의 영어 공부가 곁다리로 붙은 것 뿐이다.

대외적으로 그게 좀 더 그럴싸해보이니까.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리기에도 명분이 있어보이니까.

하지만 남편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의 영어에 큰 진전이 없어보여도,

오히려 내 영어만 더 늘어서 온 꼴이 되었어도,

돈이 아깝다거나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이 역시 발리 생활을 즐거워했다.

1년만 더 살고 싶다고 여러번 말할 만큼.

말도 안통하는 학교가 뭐가 좋은지,

엄마랑 같이 있을래? 학교 갈래?라고 물었을 때도

망설임없이 학교를 선택하며 엄마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긴 녀석이다.

스쿨링 뿐만 아니라 체조, 파델 수업처럼 처음 해보는 경험을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세 달은 사실 조금 무료했다.

짧은 여행과 달리, 여행이 일상이 되자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세 달은 새로운 도전과 경험으로 반짝 반짝 빛났다.

영어보다 그 순간의 기억과 감정이 아이의 세포에 더 오래 남아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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