บ้านยายมอญ : Baan Yai Morn에서

우리들의 유년은 어떤 색이었을까

by Jade

그랩(Grab)에서 내리자마자 쎄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가려던 카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아쉽지만 근처의 다른 카페를 검색했다. 도보 3분 거리, 시장통에 위치한 빈티지 카페를 하나 찾았다.

골목 입구로 들어서자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실내 공판장 앞, 골목 양쪽으로 좌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좁은 골목은 소란스러운 활기로 가득했다. 드문드문 나처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외국인이 보였다.


그러다 과일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망고스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들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통통하게 살찐 양 볼이 햇볕에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지금은 갈색으로 변한 녀석. 잘 익은 망고스틴 두 개를 양 볼에 얹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1kg에 60바트, 그리 비싼 것 같지도 않았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1kg만 달라고 했다. 망고스틴을 하나씩 들고 “Too soft”, “Okay”라며 골라내는 주인 아주머니의 신중한 입술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최고의 전문가가 골라주는 망고스틴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째졌다.


몇 걸음 뒤에 드디어 카페를 발견했다. 특별할 것 없는 재래시장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녹아있으면서도,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엣지가 살아있달까. 단정한 듯 어지러이 낡은 나무 벽에 걸린 액자들과 빨간색 커피 머신이 감각적이었다. 주문을 받고 분주히 커피를 내리는 젊은 부부, 그리고 그 앞 테이블에는 딸아이 셋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노(UNO) 카드를 손에 쥐고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환한 표정과 청량한 웃음소리가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책을 꺼내는 대신 골목을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다가도, 이내 꺄르르 웃는 소리에 다시 아이들에게 시선이 갔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드물게 귀한 외동딸이었다. 엄마는 내게 농사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시내버스가 하루에 세 대 들어오는 외진 시골 마을 아이치고는,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이 많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돈을 버느라 늘 바쁘셨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봐도 유년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한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아침 일찍 혹은 밤늦게 내 이마에 뽀뽀해 주던 엄마, 늦은 밤 아빠 옆에 누워 성룡이 나오던 홍콩 영화를 봤던 기억, 열이 오르던 날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보건소에 갔던 기억 정도다. 기억의 파편 어디에도 가족 여행을 갔다거나 부모님과 함께 신나게 놀아본 기억은 없다.

대신 나는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여름에는 계곡으로 가재를 잡으러 갔고, 다 마신 페트병 하나에 의지해 저수지를 헤엄치다 실수로 놓쳐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겨울에는 볼이 빨갛다 못해 갈라질 때까지 찬바람을 맞으며 놀았다. 노란 콧물을 닦아낸 옷 소매가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다. 눈이 오는 날에는 비료 포대 하나씩 둘러메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어디든 경사진 곳이라면 순식간에 썰매장으로 변했다.

배가 고플 때는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앵두나 파리똥(보리수 열매)을 따 먹었다. 때론 생가지를 꺾어 베어 물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먹을 게 없는 늦가을에는 남의 밭 노랗게 익은 배추 속을 몰래 파먹은 적도 있다. 어떤 날은 이웃집 밭에서 모종을 심거나 모내기를 돕기도 했다. 실제로 부모님은 내게 농사일을 시킨 적이 없지만, 나는 현장에서 스스로 기술을 터득했다. 그 결과 대학 시절 농활에서 동네 사람들이 이 키 작은 여학생을 데려가려고 안달이 날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농사 조기교육’에 몰두할 때도, 농공단지로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던 엄마는 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언뜻 보면 부모의 철저한 방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외로움보다는 아련함과 따스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형제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돌며 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험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연 속에서 뛰어놀던 유년은 내게 큰 위안을 준다.

내 친구도 어렸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교사여서 하교 후에는 늘 학원을 전전했단다. 엄마가 집에서 간식도 해주고 숙제를 봐주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집에 잠깐이라도 혼자있으면 외로워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한동안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똑같이 혼자였음에도 유년 시절의 질감이 이토록 다르다는 게 신기했다. 차이가 뭐였을까? 친구는 성격 탓이라 했지만, 나는 그보다 주변 환경이 더 큰 차이를 만들었을 거라 믿는다. 시골에서는 집에 있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도 밭에 나가 일을 했다. 동네 모든 어린이가 부모의 관심 밖이었기에 비교 대상이 없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 연대했다. 하지만 서울 개포동의 사정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친구에게는 뚜렷한 비교 대상이 있었고, 그 상대적 결핍의 틈새로 외로움이 싹텄을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카드 게임에 흥미를 잃었는지 무료한 표정으로 새로운 놀잇감을 찾고 있었다. 손님은 나밖에 남지 않아 카페는 한가해졌다. 젊은 부모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이 차가운 액정이 아니라, 저토록 예쁜 세 아이의 얼굴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여유가 생길 때마다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니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쳐줬으면 좋겠다.

“이봐, 정신 차려. 휴대폰이 아니라 옆에 있는 아이를 보라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웃음을 지어보이란 말이야.”

물론 그 결과는 뻔하다. 아이는 득달같이 놀아달라고 조를 것이고, 간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다시 육아가 시작될 테니까. 그래서 매번 그 마음의 소리를 듣는 건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다만, 열 번 중에 다섯 번 정도만이라도 고개를 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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