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드미 <필라델피아>
지금부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회사에서 해고당할 만한 짓을 했는지 판단해 보자. 변호사인 남자는 동성애자이며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회사에 숨기고 있다. 매우 유능한 그는 회사에서 밀고 있는 변론의 주요 변호사로 발탁된다. 그런데 쉬지 않고 일해가며 완성한 고소장이 갑자기 사라진다. 회사에서는 그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해고를 통보한다.
치명적인 병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으니 해고를 당해도 싸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상당할 것이다. 지금이야 에이즈가 혈액이나 정액으로 옮는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았지만, 그당시엔 악수만으로도 옮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만연했다. 면역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에 업무 수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회사가 자르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는 스스로 그만뒀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중요한 문서까지 흘리다니. 그런데 영화 <필라델피아>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남자는 영화의 주인공 앤드류 베켓이다.
이야기로 접할 때의 앤드류와 영화로 접하는 앤드류의 차이는 크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앤드류 쪽으로 기울게 된다. <필라델피아>가 가진 영화적 힘이다. 그는 수임한 사건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변호사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들이다. 그는 연인의 눈가를 촉촉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건을 거절했던 라이벌 변호사의 마음을 돌릴 만한 인간적 매력이 있다. 영화에는 짧은 네 줄의 이야기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앤드류의 삶이 있다. 그래서 앤드류가 회사를 상대로 건 소송에서 이기길 바라게 된다.
앤드류는 자신이 업무능력 때문에 해고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동안 그가 수임했던 사건의 만족도는 높았다. 그는 명백히 회사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임원 중 한 명이 눈치채고 고소장을 일부러 숨겨 그를 해고할 빌미를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에이즈에 걸렸다고 해서 성과가 전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고, 맡은 사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임원들이 앤드류를 해고한 이유에서 초점이 맞춰지는 부분은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인간이라기보다는 병에 걸린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임원들은 평소 게이를 비하하는 농담을 하며 동성애자를 혐오했다.
성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앤드류는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부정당했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수 있음에도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이 진행될수록 병색도 깊어진다. 하지만 그는 꼿꼿히 자리에 앉아 있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가 나고 자란 도시는 그에게 자유와 인권을 가르쳤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도시, 이름 자체에 포용의 가치를 담은 도시 필라델피아(그리스어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도시라는 뜻) 말이다. 앤드류는 이방인이 되었지만 이방인이 아니라고 소송을 통해 필사적으로 외친다.
감독 조너선 드미는 관객과 앤드류의 관계 설정에 공을 들였다. 앤드류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멀리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가 앓는 에이즈라는 병을 친근하게 느끼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조 밀러라는 캐릭터는 그 노력의 일환이다. 밀러는 동성애를 혐오한다. 하지만 병마와 싸우면서도 소송을 고집하는 앤드류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그를 변호한다. 앤드류의 게이 파티에도 참석하고, 앤드류가 오페라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것도 바라본다.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밀러는 앤드류와 여전히 거리가 있다. 소송에 이겼을 때도 밀러는 앤드류의 병실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이내 가겠다고 말한다. 밀러의 시각은 동성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시각과 유사하다. 앤드류의 진솔함을 느끼면서도 성 정체성이 이질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시대가 지닌 한계일 수 있다. <필라델피아>가 개봉한 1993년만 해도 동성애를 주제로 큰 성공을 거둔 영화는 거의 없었다. 동성애를 낯설어하는 사람이 다수였을 관객을 고려해 드미 감독은 온건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동성애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넣지 않았다. 에이즈 증상을 묘사하지 않았다. 반듯한 이미지의 배우 톰 행크스를 캐스팅했다.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는 요소는 배제하고 보편성을 강조했다. 또 관객이 자신과 비슷한 입장에 있는 밀러에 스며들어 앤드류에 접근하게끔 한다. 드미 감독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진보적이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를 우아한 방식으로 돌파하려 했다.
"난 학대받고 멍들어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나 자신을 알아볼 수도 없다네." 영화의 도입부, 필라델피아 풍경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의 가사는 마지막 장면과 조응한다. 병, 한때 동료였던 회사 사람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 인권을 상징하던 도시와 싸우며 앤드류는 학대받고 멍들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다. 연인을, 법을, 형제의 도시 필라델피아를.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읊조리는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특이하게도 도입부의 음악과 마지막 장면이 함께 기억되는 영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