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쇼샤나 May 25. 2017

노르웨이 죄수는 나보다 더 좋은 방에 살고 있었다

마이클 무어 <다음 침공은 어디?>

마이클 무어 감독

 은행 터는 영화는 많이 봤지만 '복지 제도'를 훔치는 영화는 난생 처음이다. 각 나라를 침공해서 가장 좋은 복지 제도만 골라 빼앗겠다며 감독 마이클 무어가 직접 대륙을 누빈다. 대부분이 유럽 국가들이다. 시민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자국이 갖춘 복지 제도를 자랑한다. 제도를 훔치겠다고 하면 그들은 흔쾌히 승낙한다. 무어는 제도를 빼앗은 곳에 침공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꽂는다.


 복지제도들은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년에 8주의 유급휴가를 쓸 수 있고, 독일의 많은 기업들에는 노동이사제가 정착됐다. 핀란드는 숙제 없는 교육을 모토로 하지만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노르웨이 죄수가 나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죄를 저질러 끌려온 감옥은 푹신한 침대, TV, 심지어 칼까지 구비돼 있었다(두말 할 것 없이 인테리어도 북유럽풍). 죄수들은 녹음실에서 랩을 할 수 있고 투표도 할 수 있다. 징벌보다는 교화를 우위에 둔 것이다. 그럼에도 노르웨이의 재범율은 20%로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복지국가의 위엄이 느껴지면서 헬조선에 갇힌 나의 처지가 서글퍼졌다.

셰프가 아니라 죄수다

 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미국이 한국보다 살기 좋으면 더 좋았지,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미국은 국방예산을 1000조나 책정하는 세계 최강대국이자 부국으로, 남부러워 할 것 없는 국가였다. 무어가 유럽의 제도들을 소개하며 잠깐씩 보여줬던 미국의 풍경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은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7.8%를 가져가는 불평등한 국가다(2012년 통계 기준). 인종차별이 여전히 심각해 죄 없는 흑인이 총기로 사살된다. 의료보험은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를 따른다. 1인당 의료비가 우리나라의 네 배 수준이다. '유러피언 드림'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한 시민은 영화에서 "돈을 주고 살라고 해도 미국에서는 안 산다. 당신들이 사람을,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절대 당신들의 이웃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그 많은 복지제도의 뿌리를 찾는 순간이다. 무어는 미국이 한때 이 제도들을 가졌었고, 가지려고 노력했었다고 밝힌다. 1886년 시카고에서 시작된 노동절로 미국은 노조를 갖게 됐고, 노조가 요구했던 유급휴가는 이탈리아가 이어받았다. 핀란드의 교육정책가는 미국의 정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사형제를 전세계에서 최초로, 노르웨이보다도 먼저 폐지한 곳은 미국의 미시건 주다. 무어는 다른 나라를 침공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분실물 보관함'에서 이 제도들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득 무어가 국가들을 방문할 때마다 미국 깃발을 땅에 박고, "이 제도를 저희가 훔쳐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장면들이 스쳤다. 무어는 침공이 무척 어리석은 발상임을 이 우스운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곧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는 고향 캔자스로 가기 위해 온갖 모험을 한다. 하지만 돌아가려면 단지 신발 뒤축을 부딪치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분실물 보관함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상상해봤다. 떠오른 건 제도가 아니라 희망이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할 때는 국민 한 명 한 명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1987년 시민들이 민주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을 때, 시민 한 명의 자유와 권리가 더욱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2000년 초반 유행했던 '웰빙'은 외환 위기를 이겨낸 서민들의 "이제는 좀 잘 살아보자"던 다짐을 반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도 말문이 막힌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 불공평하다고 항거했지만 회사는 들어주지 않고, 농성을 벌이다가 싸움이 벌어져도 경찰은 지켜주지 않는 세상. 대통령이 바뀌고 우리는 다시 분실물 보관함을 들여다 보고 있다. 자살률 1위 국가 한국에 희망이 깃들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계급에 속한 아이들의 성장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