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저
모든 나라에는 철수와 영희가 있다라니..
이 매력적인 부제에 책을 펼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튼’ 시리즈는 늘 이런 식으로 펴게 된다. 지금은 종이책 수집을 가능한 지양하고 있지만 언젠가 집과 책장이 허락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구입해 꽂아 놓을 책이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와 '아무튼 시리즈'가 되지 않을까.
살며 무언가에 꽂힐 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면 반드시 ‘아무튼 OOO’이 나오기 마련이고 찾아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고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시리즈. 아무튼 매력적인 시리즈다.
맞다. 나는 요즘 꽤 영어에 깊이 꽂혀있다.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배운다는 요즘 아이들에 비하면 라뗴는 중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알파벳을 배웠다. <빨간기본영어>, <맨투맨>으로 시작하는 나의 영어 여정은 중학교 2학년 <윤선생 기본영어>을 만나며 길을 잃었다. 나름 학교 시험에서 영어점수가 나쁘지 않았는데, 거기가 부모의 욕심이 더해져 시작한 <윤선생>은 아직 채 자리 잡히지 않았던 내 안의 영어 카테고리를 흔들어 놓았다. 당시만 해도 내게 영어는 그저 체계가 잡혀야하는 공부였는데, 윤선생의 영어와 학교의 영어는 달랐다.(뭐가 진짜 영어야??) 더군다나 매일 10분씩 걸려오는 전화가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나의 부모는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영포자의 길로 들어섰다. 중학교 영어가 깡통인데 고딩영어가 될 리 없었다.
이때 놓아버린 영어는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내 발목을 잡았는데, 첫번째가 수능이었다. 역대급 물수능이었던 01학번의 수능 이후 내 친구들은 누구할거없이 평균이 2-30점 가까이 올랐는데 나도 꽤 시험을 잘쳤음에도 ‘나만 망한’ 영어는 내게 '인 서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어를 피해 도망간 철학과 사회복지 전공이었던 나는 또 영어를 피해 살았다. 다들 토익공부에 정신없던 시절 ‘나는 영어 필요없을껄’로 일관한 내가 취업한 직장은 이름도 영어로 쓰인 ‘월드비전‘ 이었다.
첫 출장, 통역 직원 없이 홀로 던져진 차량 조수석에서 드라이버가 신나서 하는 케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정말 속으로 얼마나 광광 울었는지.. 와 진짜 이 놈의 영어 와…
그 경험 이후에도 한국에 돌아와 영어하겠다는 마음은 늘 바쁜 생활에 작심 두어달로 끝나고 말았다. 코딩을 배워 번역기를 만드는게 빠를까, 영어공부가 빠를까의 고민 끝에 코딩을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도망 다니면 될 줄 알았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고, 나는 영어말고 다른 일을 하면면 되니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와 줌의 발전은 굳이 비행기 타지 않더라도 해외사업장과의 맞대면을 촉발시켰고, 심지어 20개 국가 사람들 앞에서 PT를 진행해야하는 사고가 나고야 말았다. 멘붕. 결론적으로 어찌어찌 해내기는 했지만 그 PT를 준비하는 한달동안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 더는 영어로부터 도망갈데가 없다는 걸.
쪽팔리고 어쩌고를 떠나 학원을 끊고, 쉐도잉을 해야 한대서 프렌즈 에피소드 1을 통채로 외우고 있다. 매일 A4한장 분량의 필사도 한다. 외국어는 계단식으로 올라선다던데 내 계산은 한 칸이 왜 이렇게 길고 넓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보기로 했다. 두세달이 지나자 완벽하진 않지만 영어 자막으로 미드와 영화를 보는게 가능해졌다. 영어로 하는 말장난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궁금하고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쓸데없는 내 얘기가 길었는데 책은 저자가 다양한 외국어들을 접하며 만나게 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스킬을 더하는 게 아니라 그 문화 속에 들어간다는 것. 미국과 영국의 철수와 영희를 만나게 되는 일이라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책을 읽으며 그 많은 외국어에 도전하는 저자의 능력이 부러웠는데 외국어에 여전히 잼병이지만 그래도 그들을 알고싶어하는 마음은 같으니 나도 언젠가 외국어를 키워드로 어떤 썰을 풀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정말이지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