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Vin Chaud)란? 프랑스어로 뱅(vin)은 '와인'을, 쇼(chaud)는 '따뜻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따뜻한 와인을 의미하는 와인음료.
나는 뱅쇼라는 음료를 2019년 처음 접했다. 그해 가을 문득 '결혼할까?'라는 여자친구의 대답에 '콜'하여 그해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12월 얼렁뚱땅 결혼이라는 걸 했다.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예식장, 드레스, 사진, 청첩장 같은 남들 하는 형식은 갖추어야 했는데, 이 모든 걸 플래너 없이 한 달 안에 끝내야 했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11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중순이 넘어가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결혼식이 끝이 아니라 신혼여행도 가야 한다는 걸! 모두가 결혼준비도 바쁜데 신혼여행 준비까지 하면 죽어난다, 어차피 결혼식 이후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한 3일은 누워있어야 한다며 따뜻한 휴양지로(웬만하면 패키지로) 떠날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하와이니 칸쿤이니 여행사의 상품들을 하나하나 문득 어느 책에서 읽은 글귀 하나가 생각났다.
결혼식에서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행 첫날 삐그덕거리던 호텔의 창문을 열어젖혔을 때의 공기, 사람들, 습도와 들려오는 새소리는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고.
와글와글한 관광버스에서 우리의 처음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결국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검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여행은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투어로 정해졌다. 결혼 전 아내는 영국유학 시절 유럽의 몇몇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파는 뱅쇼가 얼마나 맛있는지 몇 번이고 내게 들려주었었다. 그럼 그 뱅쇼 나도 한번 먹어봐야겠다가 그 여행의 출발이었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결혼식이 끝나고 정신 차려보니 우리는 암스테르담에 있었다. 암스테드담 중앙역에서 난생처음 트램이라는 걸 탔다. 시내 근처 호텔에 캐리어 3개를 던져놓고 우리는 바로 암스테르담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향했다.
각 지역의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매년 저마다의 마켓을 상징하는 컵이 있다. 마켓 곳곳에는 뱅쇼를 판매하는 부스가 있는데 2유로에 동네이름이 예쁘게 적힌 컵에 뱅쇼를 따라준다. 그런데 그 뱅쇼가 여느 카페에서처럼 주문 즉시 제조하여 예쁘게 나오는 게 아니라 보온병에 맥심커피 내려주듯 그냥 한잔 쭈욱 내려주는 그거다. '뱅쇼 한잔이요' '여기요' 그 뱅쇼를 호호 불며 마켓을 구경하다 나가는 길에 컵을 반납하면 1유로를 돌려준다.(우리는 싹 다 가지고 왔다.)
그렇게 처음 맛본 뱅쇼. 처음에는 그저 따뜻한 와인이겠거니 했는데, 뜨끈한 음료가 목을 타고 내려오며 온몸이 훅 덥혀진다. 후. 그리고 포도주와 계피, 온갖 과일의 향과 후끈한 공기가 안에서부터 올라오며 영하의 찬공기와 부딪히는데 이 이질적인 들숨과 날숨이 그렇게나 좋았다. 새로운 세계. 태어나서 이렇게 숨 쉬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날의 공기는 신선했고 거리는 즐거웠다. 이후 나는 아직 한국에서 뱅쇼 꽤나 한다는 카페들을 찾아 뱅쇼를 맛보았는데, 아직까지는 그 어떤 카페에서도 이 뱅쇼의 맛을 구현하는 곳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두 주 동안 암스테르담을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하이젠베르크, 프라하, 빈, 잘츠부르크, 부다페스트 등 가는 도시마다 크리스마스마켓에서 뱅쇼를 맛보았고 이내 나는 뱅쇼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대체 시장통에서 단돈 1유로에 보온병에서 그냥 따라주는 와인이 뭐길래 이렇게나 맛있을 일인가.
지금 나는 대구의 미술관 옆 한 카페에 앉아있다. 커피를 시켜놓고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뱅쇼를 주문한 모양이다. 아차! 이미 라떼를 시켰지만 그냥 뱅쇼 한잔을 더 주문하기로 한다. 역시나 그 맛을 내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찾아 헤메는 것은 뱅쇼일까, 2019년 겨울의 그 좋았던 기억일까. 아무려면 어떻냐만은 이 기록은 좀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