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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Jun 12. 2024

나를 누구로 만들 것인가

제4의 벽  | 박신양, 김동훈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제4의 벽'이라고 한다. 우리가 수시로 접하는 연극, 영화, TV 등 모든 공연과 영상매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며 원리이다.

p.306


무대 위에는 배우들이 있고 우리는 관객석에 앉아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기도 하지만 무대 위와 아래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 즉 '제 4의 벽'을 이 책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게 좀 궁금했다.


우연찮게 TV를 돌리다 보게 된 <유퀴즈>에서 발견한 작가 박신양은 내가 알던 배우 박신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례자라고 해야 할까. 꽤 오랜만에 TV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셀럽보다 철학자의 얼굴에 가까웠다. 진중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오랜만이었다. 타인의 눈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를 풀고 싶어 하는, 그렇게 안으로 깊이깊이 침잠하여 유영하는 사람의 모습은.


북토크라는데, 심지어 셀럽이 출동해서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 자명한 곳에는 잘 가지 않는데 박신양이라 해서 굳이 신청해서 가게 된 이유도 그것이다. 알고 싶었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작가 박신양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왜 그가 누구나 선망하는 화려함 아닌 지방의 작은 작업실에서 물감을 온 몸에 묻히고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연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고, 홀로 있을 때 누군가가 그리워졌다고 했다. 러시아 유학 때 만난 얼굴이 그리웠고 그러면 날아가 만나면 될 일인데 그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한 획 한 장, 그리면서 그리움의 실체에 점점 다가서게 됐다고 한다. 물론 아직 그 그리움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이 그림을 완성하면 이것이 해소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10년이 넘었다.

또 그 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왔단다. 친구, 동료, 가족.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룻밤을 꼬박 새가며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 하고선 헤어지며 꼭 한마디씩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거 니가 그린 거 아니지?'


터져 나오는 한숨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그렸다고 한다. 할 수 있는 게 그거 밖에 없어서. 그리다 보니 그림들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이미 연작으로 유명해진 <사과>, <당나귀>,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TV에서도 이미 여러 번 소개되었다.(그러니 이 지면에는 줄이기로 한다.)

책은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한 박신양 작가 본인의 해설과 그 이야기를 받은 철학자 김동훈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투박하지만 진심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와 그의 투박함을 우리의 언어로 풀어주는 철학자의 이야기가 꽤 즐겁게 읽히는데 TV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한 번 정도 봤다면 사실 더 쉽게 읽힌다.


북토크 마지막 질의응답에서 누군가 '작가님은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았느냐'라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쭙잖은 생각지미나, 내가 누구일까는 이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건 나를 누구로 만들 것인가 인 것 같다고.


머리를 쿵 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맞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쉽게 하는데 '나를 누구로 만들 것인가'라는 이야기에 대답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의 말이 옳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예전부터 그의 팬이기도 했지만 더 팬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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