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 장류진 저
핀란드는 언제나 내 버킷리스트에 있었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고 햇빛보다 고요가 먼저 떠오르는 나라. 자일리톨의 나라, 설원 위에 나무들이 빽빽하고 솟아있고 그 위로는 푸른 하늘밖에 없는 풍경. 그렇게 그려지는 핀란드를 장류진이라는 글쟁이와 함께 걸을 수 있다니, 책장을 넘기며 나는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여행에 관한 에세이라 생각했다. 북유럽의 풍경과 도시 낯선 언어와 익숙한 커피잔 같은 것들이 장류진의 글에서는 어떻게 녹아들지 설렜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책은 장소보다 오래 남는, 함께 그곳을 걸어준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자꾸만 불러냈다.
작가는 이 원고를 ‘에세이’ 폴더가 아닌 ‘소설’ 폴더에 넣고 작업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막혀 있던 많은 것들이 풀렸다고. 나도 그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은 ‘어디를 갔다’보다 ‘누구와 있었나’에 가까운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진짜 오래 기억하는 건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그때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의 말투와 눈빛 웃음 같은 것들이니까.
책 속에서 친구들의 옛 닉네임과 아이디가 등장할 때 그와 같이 내 속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알파벳과 숫자가 어울린 조합, 유치하지만 익숙했던 이름들. 그리고 그걸 가리고 읽어도 음성지원처럼 들려오는 말투와 억양. 바로 친구들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자라면서 웃고 떠들며 볼 거 못 볼 거 함께 본 녀석들. 그렇게 자라며 누군가의 실수로, 오해로, 그렇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려서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못하는 친구들(이따금 거리에서 만날 때도 못 본체하고 말아버리는). 그런 그들이지만 아주 가끔 살면서 그네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불쑥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기도 하다. 물론 어떤 녀석들은 지금도 쉽게 만나 그때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녀석들도 있다.
그런 녀석 저런 녀석. 모두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생각이 났다. 그리고 문득 그 시절 나와 함께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걸 깨닫는 순간, 동심원처럼 퍼지는 감정의 파장이 밤새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자니?'는 꼭 옛 애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핀란드라는 낯선 땅을 배경으로 했지만 실은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어느 계절 그 반짝였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책 말미에 작가는 말한다. 처음엔 이 여행이야기를 왜 쓰고 싶었는지 모르겠었는데 그것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이유가 생겼다고. 책을 읽고 한참을 나도 '친구'에 대해 생각했고 그 기억을 가만히 안고 있었다.
그 반짝이던 시절은 내 안 어딘가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일부도 그 친구들의 말투와 눈빛 그들이 건넨 다정함으로 완성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그런 시간을 조용히 불러내주는 책이다. 말없이 떠나도 그 계절은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