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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Sep 23. 2021

고양이가 필요한 순간

prologue. 처음 고양이를 만난 날

인생에 한 번쯤은 고양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늦은 밤 퇴근 후 홀로 자취방 문을 열었을 때 까만 어둠 속에서 또박또박 걸어 나오는 고양이의 모습이, 소파에 털썩 앉아 고개를 누일 때 무릎에 냥 올라와 꼬물거리는 고양이가 주는 온기가, 침대 머리맡에서 최선을 다해 웅크리고 엉덩이를 내 머리로 들이대는 고양이의 귀여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정말이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녀석들은 퇴근길 주차된 차 아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를 사무실 천장에서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실제 사례). 늦은 오후 하릴없이 걷다 진열된 유리 너머로 지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으레 고양이는 도망가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제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녀석들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 눈빛을 거부할 방법은 도무지 없다.




언젠가 복지관에 홀로 남아 야근할 때였다. 한 꼬마 아이가 작은 상자를 안고 복지관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꼬물거리는 아기 고양이가 누워있었다. 하얀 고양이였고, 채 눈을 뜨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이는 작은 생명을 소중히 안고 찾아와 부탁했다.


- 선생님, 혹시 약간의 우유와 고양이 먹을 것이 있을까요?


복지관에 그런  있을 리가 없다. 우유도 없다. 아니 사실   상황이 조금 짜증이 났다. 끝나지 않는 결과보고서계획서에 짓눌려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 얘, 복지관은 고양이가 먹을 걸 보관하고 있는 데가 아니란다.

- 그래도 뭔가 먹을게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 나도 도와주고 싶다만 지금은 도무지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혹시 주운 고양이면 동물보호협회 같은데 연락은 해줄 수 있어.


아이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기분 탓이었겠지만 상자 안의 작은 고양이도 기가 죽은 것 같았다. 고양이에 대해 1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사람이 먹는 우유와 고양이가 먹는 우유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주워 들어서 아이에게 ‘고양이는 사람이 먹는 우유를 먹으면 안 된대’라고 넌지시 충고해주었고, 아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째 복지관 문을 열고 나섰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 마음이 움칫했다. 다시 아이를 찾아 뛰어 나갔다. 영화에서나 이랬던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이상한 밤이 지나가고, 그 아이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복지관이 무슨 만물상이냐’며 식식대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았다. 그 빗속으로 아이와 고양이를 내몬 나의 매정함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내가 일했던 복지관은 제법 큰 종합복지관이고 주로 아동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라 웬만한 동네 꼬마들 얼굴은 아는 편인데 그 아이의 얼굴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과 하얀 고양이가 함께였다는 것 말고는. 혹시나 싶어 허가를 받고 CCTV를 돌려보았다. 무슨 일인지 어제저녁 사무실 어떤 CCTV도 작동하지 않았다.


아마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고양이라는 존재는 내게 조금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골목 담장 위에, 주차된 차 밑에, 눈이 닿는 어디에서 지친 눈으로 앉아 있는 녀석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졌다. 태어나 동물과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는, 서른셋의 나이에 고양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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