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소비하는 시대
후원자는 소비자일까, 관계자일까? 사실 이 질문은 NGO나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질문입니다. 특히 모금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고요. 후원자를 고객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돼 있습니다.
저는 후원자를 소비자로만 보는 시선도, 관계자로만 보는 시선도 조심스러운 편입니다.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릴 수 있거든요.
우리가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고 나면 그에 따른 기대가 생깁니다. 일정 수준의 품질이나 응대, 심지어는 감정적인 만족까지도요. 후원도 더 많은 기대를 하게 하는 것 같아요.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후원자 입장에선 당연히 어떤 리턴을 기대하죠. 물론 그게 물건이나 서비스는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도와주고 있다는 감각, 누군가가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이 일에 의미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를 후원자는 원하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후원자는 일종의 소비자입니다. 더 정확히는 의미를 소비하는 소비자죠. 그래서 우리는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해요.
그들이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느끼게 더 잘 도와주고 있다고 느끼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선택이 이 세상에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줘야 하거든요.
실제로 최근 대형 NGO를 중심으로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시스템을 도입해서 후원자의 고객여정을 체계적으로 설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후원자가 후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실제 후원을 결정하고, 지속하고, 때로는 후원을 중단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죠. 마치 기업이 소비자의 소비패턴을 파악하고 고객관리를 진행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후원자는 단순한 소비자라고 하기에는 훨씬 더 깊은 관계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이기도 해요.
우리가 후원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적어도 마케팅의 언어로 단순히 어떤 재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미션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에요.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원을 나누는 사람들이죠.
특히 오랜 기간 후원을 이어온 분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자신이 도와주는 대상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일종의 책임감이나 애정을 갖고 계세요. 누군가는 “내가 이 아이의 삼촌 같은 사람이에요”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이 일이 제 삶의 한 부분이에요”라고 말씀하기도 하죠.
이런 감정은 단순히 소비자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아요. 더 깊고 더 가까운 삶에 스며든 어떤 마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후원자를 의미 기반의 파트너라고 정의합니다. 돈을 주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기관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후원자를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후원자를 늘리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더 중요한 걸 놓치게 될 수도 있어요.
한 명의 후원자를 단순한 소비자처럼 대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이어가는 관계자로 대할 것인지.
저는 이 선택이 기관의 정체성과 방향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영리기업들도 단순한 판매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을 대상으로 팬(fan)이나 사용자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죠.
또한 최근 후원 트렌드를 보면 MZ세대는 자신을 단순한 후원자보다는 참여하는 후원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투명한 실시간 소통을 선호하고 기부자가 아닌 변화의 동반자로 인식되기를 원하죠. 그리고 이 흐름은 어떤 세대를 넘어 전 세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에 따라 많은 단체들이 이렇게 후원자의 정의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자인지 소비자인지에 대한 이 경계는 사실 굉장히 애매한 선 위에 있어요. 때로는 고객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또 때로는 동료처럼 어깨를 맞댄 것처럼 응대하는 법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라져야 하거든요.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 관계를 만들어가느냐 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후원자가 문의 전화를 했을 때는 고객 서비스의 관점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응답해야 하지만 감사 편지를 쓸 때는 진심 어린 동반자로서의 마음을 담아야 하죠. 후원자 행사를 기획할 때는 고객 만족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준비하면서도 동시에 함께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놓치지 않아야 해요.
지속가능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서 후원을 잘 받는 일이 아니라 함께 가는 일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저도 언젠가부터 저는 후원자님들께 고맙다는 말보다 같이 걸어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더 자주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께도 부탁드리고 싶어요.
후원자를 단순히 후원금을 내는 사람으로만 보지 마세요. 그들은 우리 조직의 의미를 확장해주는 동료들이고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상에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순한 도움을 넘어서 함께 세상을 바꾸는 여정을 걸어갈 수 있어요.
조금 어렵지만 후원자는 소비자일 수도 있지만 관계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계를 더 크고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