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짱고책방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앎과 삶 사이에서 | 조형근 저

by 짱고아빠

1. 또 한겨레다


읽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한겨레 책을 읽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카테고리가 있다,

그건 내가 예전에 그토록 살고 싶었고 쓰고 싶었던 글. 나의 청춘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때 미쳐 살았던 세계였다.

난생처음 걸린 A형 독감으로 집에 격리되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읽고 쓰는 것밖에 없던 막다른 골목에서 이 책을 만났다.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을 거절할 수 있었다면 거절했을까. 잘 모르겠다.


<앎과 삶 사이>에서는 그렇게, 내가 한동안 멀찍이 떨어져 두었던 질문을 다시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알고 있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의 거리,

정의를 말해왔던 언어와 지금의 나 사이의 어색한 침묵 같은 것들.

내 헛웃음 뒤에는 오래 묵은 마음의 찌꺼기 같은 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지점을 비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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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중간한 사람들


이 책이 가장 집요하게 붙드는 존재는 ‘악인’도 ‘영웅’도 아니다. 저자가 반복해서 호출하는 건 늘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법을 지키며 자기 이해를 추구하고, 대체로 무해하고 선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다수의 얼굴들. 바로 우리다.

조형근은 거악과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그 구조가 유지되는 데 기여하는 개별 행위자로서의 소시민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 본인 또한 “이런 세상을 만든 데 나의 기여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동시에 너무 정확해서 외면하기 어렵다.


이 책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몰아붙이기보다, 책임의 결을 세밀하게 나눈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이 결국 아무의 책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저자는 다시 ‘작은 개인들’을 정치적 주체로 호명한다.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했고, 1987년 군부 독재가 무너졌으며, 2024년의 내란이 막혔던 이유를 그는 이 ‘어중간한 사람들’의 선택에서 찾는다.



3. 앎과 삶은 다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책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매체와 개인 SNS에 발표된 글을 묶은 칼럼집이다.

그래서 책은 늘 구체적인 장면에서 출발한다.

집, 가족, 이웃, 마을, 친구, 그리고 동시대를 통과한 사건들. 세월호와 이태원, 미얀마와 팬데믹, 산재 사고와 내란 이후의 광장까지.

다만 저자는 언제나 한 발 더 들어간다. 사건을 소비하지 않고 구조만 탓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읽다 보면 저자는 '글은 자신의 삶보다 정의로워서 쓰기 어렵다'고 몇 차례 고백한다.

나도 그랬다. 말은 언제나 삶보다 앞서 있었고, 그 말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일상은 늘 어딘가 비겁해 보였다.

이 책은 그 간극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간극 앞에 고민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쓰는 걸 멈추어야 할까.

삶보다 정의로운 글 때문에 때로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도 많지만,

그 민망함을 걱정하는 마음이 또 나를 잘 살게 하기도 한다.

저자는 마치 내게 그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듯했다.



4. 어떻게 살아야 할까


책의 마지막은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거창한 해답은 없다.

대신 저자는 냉소로 물러서지 말자고, 죄책감과 화해하는 데서 멈추지 말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진보적인’ 태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방치해왔는지를 짚으면서도,

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작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고 믿는다.


조형근의 글은 불편하지만 차갑지 않고, 비판적이지만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군가를 각성시키기보다는, 스스로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앎과 삶 사이에서 자꾸만 중심을 잃는 사람에게, 이 책은 정답 대신 질문을 건넨다.

그리고 그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 준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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