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주성철 저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한풀 꺾인 뒤에야 영화에 눈을 뜬 나는 아직 <중경삼림>도 <화양연화>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양조위라는 이름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기억나는 작품은 <해피투게더>, <적벽대전>, <색, 계>, <텐링즈>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를 읽었다.
“티 없이 맑은 소년의 얼굴, 우리 시대의 ‘화양연화’ 양조위.”
출판사의 이 표현은 아마 과장이 아닐 것이다. 실제 젊은 시절의 그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설명되지 않는 투명함이 있다.
연기를 덧입히지 않은 얼굴, 그러나 이미 감정이 차오른 눈동자.
이 책은 그 눈빛 속에 축적된 세월을 복원하듯 꺼내 보인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하듯, 한 배우의 시간과 도시의 기억을 겹쳐 보여준다.
이 평전이 흥미로운 이유는 배우 개인의 성장기를 홍콩 영화 산업의 흥망과 교차시킨다는 점이다.
1980~90년대 홍콩은 아시아 영화산업의 심장이었다.
TVB의 스타 시스템은 안정적인 인재 공급 구조를 만들었고,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는 장르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액션과 누아르, 멜로와 실험영화가 공존하던 독특한 생태계.
여기에 1997년 자유 서방세계에서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의 불안과 정체성 혼란이 더해졌다.
TV 드라마 스타로 출발해 허우샤오시엔, 오우삼, 왕가위에 이르는 감독들과 작업하며 그는 단순한 흥행 배우를 넘어 시대의 얼굴이 되었다.
특히 왕가위 영화 속에서 그는 기다리는 인물, 남겨진 사람의 정서를 구현했다고 한다.
격정 대신 침묵으로, 대사 대신 호흡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
그는 홍콩 영화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모색하던 과도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영화 산업은 빠르게 재편되었다. 제작 편수는 줄고 자본은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블록버스터가 늘어났고, 홍콩 고유의 색채는 점차 옅어졌다.
많은 배우들이 중국 혹은 할리우드로 발길을 돌렸다. 그 변화 속을 유유히 유영하면서도 양조위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홍콩배우’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하나의 정의처럼 느껴졌다.
양조위를 생각하면 말이나 행동의 화려함보다 꾹 다문 그의 입술, 그의 침묵이 먼저 떠오른다.
<무간도>의 흔들리는 눈빛, <색, 계>에서 감정이 스며드는 순간들.
그는 극적인 몸짓보다 미세한 표정 변화로 장면을 장악한다. 산업은 쇠퇴했고 시장은 바뀌었지만, 그의 연기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은 그래서 배우를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보다, 한 시대를 통과해온 얼굴을 기록한다.
어린 시절의 결핍,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내향성, 작품을 선택하는 신중함. 그 모든 층위가 겹치며 지금의 양조위를 만든다.
우리가 홍콩 영화의 영광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결국 배우의 이런 얼굴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책을 덮고 나는 넷플릭스에 <중경삼림>, <화양연화>, <아비정전>을 봐야 할 영화로 저장했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라도 그 시간을 따라가보고 싶어졌다.
나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지만 이 책 덕분에 그 시절의 공기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산업은 흥하고 쇠하지만, 어떤 이의 눈빛은 시간을 건너 남는다.
그리고 그 눈빛을 이제야 천천히 마주해 보려 한다.
홍콩 영화를 추억하는 이는 물론 그 영광의 시대를 함께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