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가 F1 드라이버로 나오는 영화, F1 더 무비가 인기리에 상영중이다. 영화는 F1 차량의 가속, 제동, 추월, 충돌 등 동적인 장면을 절묘한 카메라 앵글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엔진 굉음과 타이어 마찰음 등 청각 효과를 더하여 F1 레이싱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것 때문인지 지난 6월 말에 개봉한 영화는 관객 수 500만명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필자도 마치 F1 드라이버가 된 듯 몰입해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많은 장면 중에 하나를 떠올려 본다.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 연기)가 이탈리아 몬자의 트랙에서 레이싱 팀원들과 아침 조깅을 하며 자기 아버지의 말을 해주는 장면이다. "느리면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빠르다." 다들 무심히 넘기는 것 같았지만 *피트 크루 중의 한 사람, 조디는 그 말을 마음 속에 새겨 둔다.
지난 영국 실버스톤 대회에서 조디는 피트 스탑시 실수를 하였었다. 죠슈아 피어스(소니 헤이스의 팀 동료 드라이버)가 타이어를 교환하기 위해 피트에 들어 왔을 때, 사용한 휠건을 바닥에 놓아 두는 실수를 한 것이다. 이 실수로 인해 타이어가 손상되었고 죠슈아는 피트로 바로 다시 들어 와야만 했다. 죠슈아는 조디를 비난했고 조디는 이것으로 자책하는 마음이 컸다. 피트 스탑은 모터 스포츠에서 차량이 급유, 타이어 교체, 차량의 수리, 기계적 조정 및 드라이버 교체 등을 위해 피트로 들어와 정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문 피트 크루는 거의 3초 안에 모든 것을 끝낸다고 한다. 이러한 피트 스탑을 거의 7초나 걸려 수행하였고, 거기에 타이어 손상까지 입게 하였으니 그 자책감이 참으로 컸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였었기에 조디는 소니의 말을 흘려 들을 수 없었고 서두르지 않되 빨리 휠건을 작동하는 연습을 많이 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F1 대회가 열리는 벨기에 스파-프랑코상 서킷. 조디는 소니 헤이스가 피트에 들어 올 때 팀원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준다. "느리면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빠르다. 갑시다." 그리고는 타이어 교체 완료! 물론 아주 짧은 시간안에! 결국 소니는 APX 팀 역사상 처음으로 F1 우승을 하였고 온 팀원들이 피니쉬 라인으로 나가 우승을 즐기는 장면이 이어진다.
사실 느리면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빠르다는 말은 필자가 독일의 뉘르부르그링 서킷에서 운전 교육 받을 때, 운전을 가르쳐준 W책임이 내게 자주 해주던 말이었다. 영화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내가 레이스 트랙에서 드라이빙 교육을 받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뉘르부르그링의 트랙은 N24 레이스 등 자동차 경주를 위해 사용되지만 레이스가 없는 기간에는 자동차 회사들이 차량 개발을 위해 사용하는 트랙이다. 트랙에서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트랙에 특화된 트레이닝을 받고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한다. 필자도 현대차 유럽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차량 평가를 위해 트랙 주행이 필요했고 약 2년 동안의 교육과 연습을 통해 라이센스를 취득하였다.
W책임과 나는 저녁 시간에 주행 연습을 위해 뉘르부르그링 레이스 트랙을 자주 주행하였다. 처음 한 두 바퀴는 W책임이 운전하면서 트랙의 특징과 운전법을 설명하였고 타이어가 예열된 후 3~4랩은 내가 운전하며 W책임의 설명과 평가를 받는 과정이 이어졌다. 뉘르 트랙은 코너가 많고 타이트해서 제동 - 턴 인 - 가속하며 턴 아웃하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왔다. 랩 타임 단축과 차량의 성능 평가를 위해서는 코너를 빨리 돌아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빨리 코너를 돌아 나가려고 하면 할 수록 코너 진입시 감속이 충분히 되지 않았고 제동과 가속 페달 조작, 스티어링 휠 조작이 부드럽지 않고 급하게 이루어졌다. 차량은 타이어에서 발생하는 가속 토크, 제동력, 코너링 포스의 변화에 반응하여 흔들리며 불안한 거동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충분히 낮은 속도로 코너에 진입하여 차량의 거동을 느끼며 조작에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다 보니 모든 조작이 서로 연결되며 부드러워졌고 결과적으로 아주 빠르게 코너를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서두른다고 빨리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느리다고 끝까지 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생 교훈을 하나 더 얻는 순간이었다.
현대인의 삶은 참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바로 내일 새벽에 문 앞에 오게 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ChatGPT에게 바로 물어 본다. 멀리 있는 가족에게 카톡이나 영상 통화로 소식을 바로 전할 수 있다. 청춘남녀가 서로 교제를 할 때도 우리 사귈래? OK, 그러고 바로 연인 사이 첫날이 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자녀들의 학업이나 학교 성적, 입시에 대해서도 부모님들의 시계는 언제나 빠른 편이다.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다림을 참지 못한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빠르게 전개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기다림을 더욱 참지 못하는 것 같다. 기다림을 낭비하는 시간으로 여기며 지루해 한다. 잠시라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폰을 꺼내서 게임을 하던, 유튜브 영상을 보던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필자가 독일에서 근무할 때 느낀 바로는 독일 사람들은 한국인에 비해 기다림을 잘 참는 것 같았다.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할 때 계산대에 있는 점원의 손길은 한국인에 비해 매우 느린데 혹시 작은 문제라도 발생하는 경우에는 늘어진 줄 가운데서 1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유독 나만이 고개를 빼서 왜 이렇게 줄이 안줄어드나 살펴보곤 했다. 다른 독일 사람들은 뭐 언젠가 해결하고 계산해 주겠지 하며 앞뒤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고 있거나 또는 조용히 있었다. 그 표정에서 지루함이나 조급함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출근하려면 매일 지나야 하는 20m 정도의 골목길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아스팔트 재포장 공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20m 남짓 도로를 포장하는데 거의 한 달이나 걸렸다. 내가 놀랐던 것은 포장을 하고 나서 도로를 막고 양생하는데 2주나 되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기존 아스팔트 갈아 엎고 바닥 다진 뒤에 아스콘 깔고 롤러로 밀어주면 며칠 만에 통행할 수 있었을텐데, 여기 독일은 작은 것 하나라도 시간을 가지고 완벽하게 진행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동네 주민들도 불평해 하지 않으면서 당연히 그 정도 기다려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길을 돌아 다녔다.
크리스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에는 MIT의 리처드 라슨 교수의 휴스톤 공항 연구 사례가 나온다. 휴스톤 공항은 승객들이 수하물을 찾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불평이 쏟아지는 공항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을 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8분이었는데 이는 다른 공항의 평균 대기 시간보다 짧은 편이었다. 평균시간 8분은 비행기에서 수하물 찾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1분, 수하물을 기다리는 시간 7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구팀은 7분이라는 대기 시간을 걷기 같은 활동 대신 가방을 기다리는 데만 보냈기 때문에 승객들의 인식이 왜곡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휴스톤 공항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공항은 수하물 찾는 곳을 걸어서 6분 되는 거리로 더 멀리 옮겼다. 승객들은 6분 정도를 걸어서 수하물 찾는 곳까지 걸어 가야 했지만 가방을 기다리는 시간은 1~2분 밖에 되지 않았다. 대기 시간은 같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을 걷기라는 의미있는 활동으로 채울 때 불평이 크게 줄어 들었다.
느리다는 것,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 시간을 의미있는 것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턴은 아이들의 무료한 시간, 즉 구조화되지 않은 시간이 아이들의 창의성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기다림을 낭비되는 시간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지루함을 그 자체로 받아 들이며 마음과 두뇌를 여유로 좀 쉬게 할 필요가 있다. 입시를 위한 속성 과외 같은 것이 효과가 있겠지만 천천히 한 공부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뭔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지연되고 있는가? 기다린 만큼 열매는 더 달고 귀하다. 자녀들이 학업에 느리다고 책망하지 말라. 그는 지금 기초를 다지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느린 것을 기다리며 참아라, 기다림을 기대로 바라 보자, 지연이 아니다. 조금 천천히 살아 보자.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 지 살펴 보자. 느리게 살면서 우리 삶의 생각과 동작들이 부드럽게 이어지면 과정을 기다릴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빠른 변화의 속도를 느끼게 될 것이다.
* 피트 크루 : 피트 스탑시 레이스카의 타이어를 포함한 장비 교체를 수행하는 스태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