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의 사람들

신차 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평가 차량이 필요하다. 신차의 개발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경쟁차가 3~5대, 파워트레인과 플랫폼의 강건성을 확인하기 위한 T-Car가 10~15대 필요하다. 시작차 단계로 접어들면 각각의 주요 성능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통상 50여대를 시험차로 제작하며 파이롯트 단계에서는 공장 조립 관련 품질 안정화, 인증 등을 위한 차량이 약 100여대 이상 필요하다. 양산 단계로 들어 가도 안정화된 양산 품질 수준 확인을 위해 많은 차량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차량의 총 수요는 유동적이며 최근에는 개발 기간 단축, 개발비 절감을 위해 비싼 시험차 제작은 줄이고 버추얼 개발 기법을 활용한 프로트리스(Protoless) 개발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물리적 시험차 (physical test car) 제작을 완전히 생략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차량의 평가를 위해서는 목적에 따라 1인에서 4인까지 평가자가 탑승한다. 실무적인 개발을 위해서는 통상 2인이 탑승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한 명은 드라이버, 한 명은 계측기 조작을 담당한다. 계측 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경우에도 두 명의 탑승자는 차량 성능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 교환, 주요 문제점 및 발생 조건 확인, 운전석/조수석/2열 VIP석(/3열) 에서의 성능을 평가하기 위해 자리를 바꿔가며 드라이버와 평가자 역할을 수행한다. 1인 탑승의 경우는 개발자 또는 개발 책임자가 시험차의 전반적인 성능에 대해 감을 잡거나 차량의 개발 방향 파악, 문제점 발견 및 개선 확인을 위해 타는 경우이다. 보통 PG (Proving Ground)나 출퇴근시 일반도로 등과 같이 늘 다녀서 익숙한 곳에서의 평가인 경우가 많다.


한편 시승이나 외부 주행 트립 등과 같은 이벤트성 행사인 경우에는 통상 3인 이상이 탑승하게 된다. 시승 행사에서는 보통 고위직의 총책임자가 운전과 평가를 하며 개발 담당자들은 조수석과 2열에 동승하여 총책임자의 평가 내용을 청취하거나 필요한 설명을 한다. 외부 주행 트립(Ride & Drive) 인 경우에는 구간 별로 운전자와 평가 위치를 교대하기 때문에 실제 고객들이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의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며, 탑승자간의 의견 교환을 통해 중점 개발 방향, 개발 항목 및 성능 간 조화개발 목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회장, 부회장, 사장급의 최고 경영진과 함께 탑승하는 경우에는 본인의 역할이 무엇 이던지 간에 시승 행사나 외부 주행 트립이 매우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최고 경영진이 어떤 문제점을 지적할까 불안하다. 문제점이 아직 남아 있는 경우에는 지적된 문제에 대해 현상과 대책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변명만 할 것 같은 마음에 시승 전후가 참 괴롭다. 드라이버로서 시험차를 운전할 때는 중점 개발 성능이 부각되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승차감이 유지되도록 운전에 특별히 신경쓰기도 한다. 때로는 최적 중량 조건으로 평가하기 위해 탑승 인원을 제한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최고 경영진과 단 둘이 차를 타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개발자들의 시승 관련 독특한 경험은 그 때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좋은 차 개발의 밑거름이 되고 동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재밌는 추억으로 남을 터, 놓칠 수 없는 차량 개발의 묘미이다.


외부 주행 트립이 결정되면 총합시험팀은 시승차, 평가 조원, 평가루트, 운전자 교체 지점을 포함한 종합 계획을 수립하여 배포한다. 종합 계획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부분은 누가 나와 같은 조로 편성되었는가 이다. 차량 평가와 개발을 위한 이벤트이지만 같이 하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아주 유용할 수도 별 성과 없이 고생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그만 문제점에도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지적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담당한 성능의 개발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문제점을 부드럽고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현상과 개선 계획에 대해 주의깊게 청취하고 지지해주는 사람, 자기의 담당 성능과 타 성능과의 조화 개발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최적의 솔루션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다. 더욱이 평소 존경하는 분, 합이 잘 맞는 사람, 관계가 좋은 사람들과 같은 조로 편성된다면 외부 주행 시작 전부터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차 안에 같이 탄 사람들로 인해 평가도 의미 있게 진행될 뿐 아니라 과정 자체도 즐거운 것이다.


라라 E. 필링은 '홀로서기' 책에서 인간과 인간 삶의 여정을 자동차와 도로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자동차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스포츠카는 경주 트랙에서는 빠르고 날렵하게 주행할 수 있지만 스피드 범프가 있는 도심이나 비포장도로에서는 장점을 살릴 수 없고, 오프로드 지프차는 가속 능력은 떨어지지만 비포장 도로에서는 어떤 차보다 더 잘 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창의적이지만 쉽게 지치는 사람,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적어도 포기하지 않고 위기를 잘 극복해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기의 장점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특성과 장점을 살려 자기 삶을 잘 펼쳐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려운 인생을 살아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나'라는 차종을 바꿀 수 없다. 처음 주어진 차종으로 끝까지 완주해야 하므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나 외부요인을 나의 탓으로 돌리면 안된다.


'나'라는 자동차는 삶이라는 도로를 주행하면서 다양한 승객을 태우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 나를 위해 희생을 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간다면 나의 자동차는 아주 빨리 편안하게 달려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실제로는 거의 없다. 내 차 안에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 내게 상처 주는 사람,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운전은 어려워지고 눈치를 보게 되며 나만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다른 승객이 없는 경우에도 차 안에는 여러 모습의 내가 타고 있다. 과거에 상처받은 나, 힘들게 지냈던, 초라했던 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했던 나, ... . 이 모든 자아가 현재의 나이니까. 이러한 나의 부정적 자아는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특정 조건이 되어 과거의 상처가 건드려지면 소리치며 반항하는 내 안의 내가 된다. 현재의 내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없게 난동을 부리는 것이다. 비교로 인한 수치심,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버림받은 비참한 감정, 불안과 초조, 우울, 낮아지는 자존감, 열등감과 두려움 등을 떠올리게 되어 운전하는 게 힘들어지고 신호를 지킬 수 없거나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승객이 난동을 부릴 때는 얼른 잠재우거나 진정시키기 위해 통상 난동 승객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하게 되면 자동적 부정적 심리 습관이 형성된다.


이런 승객이 내 차 안에서 난동 부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의 화살이 당겨지기 전에 차를 안전한 곳에 일시 정차시키고 과거의 상처받은 내가 왜 지금 난동을 부리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의 상처받은 자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 때의 나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루만지며 달래주어야 한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승객은 절대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언성을 높이고 횡포를 부려도 승객은 승객일 뿐이다. 주도권은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면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


과거에 상처받은 나는 아니지만 완벽주의자도 차 안에 타고 있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완벽을 기하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하며 결과에 본인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는다. 또한 완벽주의자는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인생사의 중요 시점마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주의 성향은 선택을 어렵게 만들고 선택 과정에서 불안감, 고민, 부담감을 줌으로써 나를 힘들게 만든다. 선택 후에는 자신의 선택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극도로 몰아 붙이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긴장감 속에서 힘들게 살아간다. 또는 선택을 미루다가 시간이 촉박하여져서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완벽주의자가 내 차안에 타고 있다면 그에게 말해주자. 차선의 선택을 해도 좋다,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내가 운전하는 차에 상처받은 다른 '나'가 타고 있다는 비유는 심리상담 기법 중 에릭 버언(Eric Berne)의 교류 분석 (Transactional Analysis)과 배경이 비슷하다. 언어적 , 비언어적 의사 소통에 의한 상호 교류는 개인의 자아 형성에 영향을 미치며 형성된 자아나 삶의 태도는 또한 개인의 교류 형태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의사소통의 교류 형태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분석하여 개인의 성격과 자아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 상담 기법을 교류 분석이라고 한다. 교류 분석에서는 부모 자아, 성인 자아, 아이 자아의 세 가지 종류의 자아가 있다고 본다. 부모 자아는 아동이 실제 부모님의 양육 태도와 삶의 자세로부터 영향받아 형성된 자아인데 가르치고 통제하며 명령을 강요하는 특성과 포용하며 지지해주는 특성을 지닌다. 성인 자아는 부모 자아와 아이 자아가 균형을 맞추도록 조절하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아이 자아는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반응하며 형성된 자아로서 즐거움 추구, 창의성, 자발성, 자유분방한 아동의 특성과 부모의 권위에 억눌려 순종하는 특성을 보인다. 교류 분석에서는 자아 간의 균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배려나 수용 없이 강압적인 삶의 자세를 보이거나 타인의 의견을 수용만 하는 사람, 사회적 규율 없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 의기소침하여 매사 주저하며 걱정하는 사람 등과 같이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존 브래드 쇼(John Bradshaw)는 '상처받은 내면 아이 치유' 에서 내면 아이 치유법을 제안하였다. 어릴 때 정서적으로 수용 받지 못하고 상처와 좌절 속에 살았던 환경에 의해 아이의 자아가 부정적으로 형성되게 되면 이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정적 아이 자아가 성인 자아에 영향을 미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릴 적 받지 못한 정서적 수용과 어루만짐을 현재의 성인 자아가 해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심리적으로 강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치유법의 주요 내용이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릴 적의 상처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심리학적 임상 케이스가 많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교류 분석은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실패의 경험이 새로운 상황과 대인관계에 대해 불안하게 만드는 경험들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개인의 상황에 맞춰 잘 적용한다면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는 내 차에 탄 다른 내 자신에게 차선의 선택을 해도 행복해 질 수 있다, 네 잘못 아니야, 힘들었지? 이젠 좀 쉬었다 가자 라는 말을 하며 실패의 경험으로 힘들어 하는 자신을 수용하며 달래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현재 내가 운전하고 있는 삶의 자동차가 원하는 곳까지 편안하고 안전 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 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레. 노안영 저

존 브래드쇼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라라 E. 필링은 '홀로서기'

작가의 이전글진급 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