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바라보던 아이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창밖을 바라봤다. 저 산 너머엔 뭐가 있을까, 저 별들 사이엔 누가 살고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방 한켠의 브라운관 TV 속엔 늘 우주가 있었다. 〈로봇 태권브이〉, 〈은하철도 999〉— 하늘을 나는 로봇과 별 사이를 오가는 기차를 보며, 나는 막연하게 믿었다. ‘나도 언젠가 저기 가게 될 거야.’
그 믿음은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현실보다 미래를 더 신뢰했으니까. 지금의 아이들이 게임 속 세상을 꿈꾸듯, 나는 TV 속 은하를 내 미래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그 단순한 호기심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었다.
‘여기가 아닌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견디게 했다. 그 작은 창문이 내게 보여준 건 결국 우주가 아니라, 하나의 탈출구였다.
그리고 그 충동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류는 늘 한계 너머를 향해 공간을 확장해왔다. 움막에서 신전으로, 평지에서 마천루로. 더 높이, 더 멀리, 더 깊이.
문득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는 걸까.
1969년, 인류는 달에 발을 디뎠다. 그날 이후 인간은 처음으로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었습니다.” 우주비행사들이 공통으로 남긴 말이다. 400km 상공에서 본 지구엔 전쟁도, 인종도, 종교도 구분되지 않는다. 산소와 질소가 만든 파란 막, 두께 100km. 그 얇은 껍질 안에 모든 생명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오버뷰 효과’를 경험한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지구의 아름다움과 취약함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순간.
러시아의 가가린은 귀환 후 말했다. “저 위에서 보니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겠더라. 저렇게 작고 연약한 별 위에서 왜 서로를 미워하는지.”
아이러니하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지구를 가장 사랑하게 된다.
역사책에서 배운 ‘신대륙 발견’은 사실 일방적인 단어였다. 누군가의 발견은 다른 누군가의 상실이었다. 정복자들은 언제나 ‘빈 땅’을 찾았고, 그곳을 채울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빈 땅’을 향해 있다. 화성에는 원주민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어 있음’의 선언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였다. 문제는 화성이 비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곳을 채울 권리를 가지느냐다.
“한 바구니에 모든 계란을 담지 말자.” 우주 탐사의 명분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숫자는 말이 다르다. NASA의 연간 예산 258억 달러, 그해 미국 국방비는 8,420억 달러, 전 세계 화석연료 보조금은 7조 달러였다.
인류는 화성을 꿈꾸지만, 지구를 돌보지 않는다. 우주 탐사가 모두를 위한 꿈이 아니라 돈 많은 몇몇 개인의 탈출 판타지로 소비될 때, 그건 진보가 아니라 특권의 은유가 된다.
지난여름, 우리 동네 하천이 말랐다.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던 곳엔 자갈만 남았다. 나는 쿠팡 로켓배송으로 주문한 물건을 당일에 받으며 ‘환경’을 말하고, 카페에서 일회용 컵을 들고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스페이스X의 발사 장면에 감탄하면서도, ‘우주 개발은 사치다’라고 쓴다. 학자들은 ‘탄소중립’을 말하며 논문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에너지 낭비의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말한다. “대화하고 이해하면 된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묻자. 기후위기는 개인의 윤리 문제인가, 아니면 구조의 문제인가.
우리는 개인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만, 사회는 만남을 차단한다. 아파트는 방음을 자랑하지만, 층간소음은 여전하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듣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가까이 들려버린다. 거리는 줄었지만, 마음의 간격은 오히려 더 멀어졌다.
나는 옆집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 그래도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그 짧은 인사조차 어쩌면,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적 신호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만남을 ‘비효율’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확장은 인류의 본능이다. 그러나 방향을 잃은 본능은 파괴로 이어진다.
우주는 탈출구가 아니라 거울이다.
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새로운 행성이 아니라, 이 작은 별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오늘 밤,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별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빛의 절반은 도시의 불빛에 삼켜졌다. 우리는 우주로 가려 애쓰지만, 정작 하늘을 잃어버렸다. 화성에 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언젠가 우리가 정말 별에 닿는 날이 온다면, 그때 가져가야 할 것은 더 빠른 로켓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넸던 작은 인사, 함께 밥을 먹던 저녁의 시간, 그리고 한때 이 행성을 사랑했던 기억들이다.
그것이 어쩌면, 저 창밖을 바라보던 어린아이가 진짜 찾고 있던 우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