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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pace and Time

도시를 걷는다는 것

케빈 린치의 '지도'와 발터 벤야민의 '추억' 사이에서

by Jwook

내비게이션을 끈 날의 발견


저녁 약속이 있던 날, 버스에서 내려 카카오맵을 켰다. 대전 구도심은 오래된 건물과 새 간판이 뒤섞인 동네라, 몇 번 와봤어도 정확한 식당 위치를 찾으려면 지도를 켜야만 한다.


화면 속 파란 점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안내음성이 들리면 고개를 돌리고, 파란 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지도를 껐다. “이쯤이면 되겠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 거리의 공기가 달라졌다. 페인트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 오래된 LP바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낡은 간판의 빛바랜 글자들이 저마다 시간을 품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한 도시 안에서 두 개의 도시를 살고 있었다. 하나는 지도가 알려주는 ‘길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발끝이 기억하는 ‘감각의 도시’.


전자는 케빈 린치가 말한 명료한 도시, 후자는 발터 벤야민이 사유한 기억의 도시다.

지도는 목적지를 알려주지만, 발걸음은 나를 알려준다.


케빈 린치 —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도시


1960년, 도시계획가 케빈 린치는 『도시의 이미지』에서 혁명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어떻게 도시를 기억하는가?" 그는 보스턴 시민들에게 자신이 사는 도시를 그려보라고 요청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요소들을 그려냈다. 주요 도로,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 강이나 철도 같은 경계선.


린치는 이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길(Paths), 랜드마크(Landmarks), 경계(Edges), 구역(Districts), 결절점(Nodes).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시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인지적 지도'의 구성 요소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을 예로 들어보자. 세종대로는 명확한 '길'이고, 광화문과 세종대왕 동상은 누구나 알아보는 '랜드마크‘이다. 청계천은 종로와 을지로를 가르는 '경계'이며, 인사동은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구역'이다. 광화문 사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결절점'이다.


린치가 추구한 것은 '심상성(imageability)'이 높은 도시, 즉 누구나 쉽게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는 도시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도로 팽창하던 미국 도시들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린치는 명료한 구조가 곧 시민들의 심리적 안정이라고 믿었다. 그의 도시는 '읽기 쉬운 책'이어야 했다.

읽기 쉬운 도시, 기억되는 거리. 케빈 린치가 그린 ‘도시의 이미지’의 기본 문법

발터 벤야민 — 길을 잃기 위한 도시


하지만 1920년대 베를린과 파리를 걷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정반대의 질문을 했다. "도시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도시는 명료하게 읽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미로처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도시였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해부하며, 근대 자본주의의 욕망과 환상을 읽어냈다. 유리 지붕 아래 늘어선 쇼윈도와 전기 조명, 그리고 유행을 좇는 군중들 — 그 빛의 풍경 속에서 그는 근대인의 무의식이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했다.


벤야민은 그곳을 ‘꿈의 집’이라 불렀다. 자본이 만들어낸 화려한 꿈, 그러나 동시에 깨어날 수 없는 꿈. 그에게 아케이드는 도시가 꾸는 집단적 꿈이자, 근대가 스스로에게 건넨 유혹의 거울이었다.


그 환상 속을 거니는 이가 바로 플라뇌르(flâneur),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다. 플라뇌르는 목적지 없이 걷는다.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듯 느리게, 관찰하듯 주의 깊게. 그는 군중 속에 섞이지만 군중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도시의 표면 아래 감춰진 시간의 층위들을 포착한다.


내가 구도심 골목에서 본 '○○LP바' 간판은 린치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방향을 알려주지도, 특별한 표지물도 아니다. 하지만 벤야민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꿈이 새겨진 화석이다.


서울의 낡은 간판들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한강의 기적을 믿었던 세대의 땀이 배어 있었다.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질 노동의 풍경. 그 간판 앞에 서는 순간, 나는 단순히 공간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거북의 속도로 걷는 도시의 철학자, 플라뇌르의 초상

두 개의 도시, 하나의 긴장


린치와 벤야민은 화해할 수 없다. 린치가 "어떻게 하면 길을 잃지 않을까"를 고민했다면, 벤야민은 "어떻게 하면 의도적으로 길을 잃을 수 있을까"를 질문했다.


린치는 전후 미국의 교외화와 자동차 문화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고, 벤야민은 파시즘이 부상하던 유럽에서 근대성의 파국을 예감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 두 도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출근길, 나는 린치의 도시를 산다. 가장 빠른 지하철 노선, 가장 가까운 출구, 비를 피할 수 있는 지하도. 효율과 예측 가능성의 세계다.


그러나 점심시간, 골목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서점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헌책들, 1980년대 시집의 누렇게 바랜 페이지. 그 순간 나는 벤야민의 도시로 미끄러진다.


스마트폰이 빼앗아간 것


오늘날 우리는 린치가 꿈꾸던 '명료한 도시'를 완성했다. 스마트폰 지도는 실시간으로 내 위치를 알려주고, 목적지까지의 최적 경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길을 잃을 자유'를 잃어버렸다.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맛집은 모두가 가는 곳이다. 인스타그램 핫플은 누군가 이미 발견한 장소다. 우리는 도시를 탐험하는 대신, 검증된 경로만을 반복한다. 벤야민의 플라뇌르가 우연과 발견의 기쁨을 누렸다면,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확실성의 감옥에 갇혀 있다.


나를 발견하는 산책

그렇다면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린치의 명료함과 벤야민의 모호함 사이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린치의 도시는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벤야민의 도시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 간판은 누가 달았을까? 이 골목은 왜 이런 냄새가 날까? 20년 전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질문들 속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과 만난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걷게 되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빠르게 걷기만 할 때는 놓쳤던 것들이, 느린 걸음 속에서 하나둘 드러난다.


늘 무심히 지나치던 담벼락의 나무 그늘, 골목 모퉁이 작은 제과점에서 풍겨오는 빵 굽는 냄새, 그리고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골목 고양이의 눈빛. 이런 감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의 도시’가 만들어진다.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경험하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며, 나의 기억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린치가 제공하는 구조 위에서, 벤야민이 가르쳐준 산책의 태도로, 나는 비로소 이 도시의 주민이 아니라 이 도시의 해석자가 된다.

내일의 산책을 위하여


내일은 평소보다 열 분쯤 일찍 집을 나서 보자. 그리고 늘 걷던 길에서 단 한 블록만 비껴 걸어보자. 내비게이션은 잠시 꺼두고, 발이 닿는 대로 천천히 걸어보자.


낡은 간판에 시선을 두고, 골목 어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벽에 남은 낙서 앞에서, 그냥 잠시 멈춰 서라.


그 순간, 당신은 린치의 효율적인 도시에서 벗어나 벤야민의 시간이 흐르는 도시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 어딘가에서, 당신은 지도에는 없지만 당신만이 아는 도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도시는 완성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걷고, 느끼고, 기억하는 우리에 의해 매일 새롭게 쓰이는 이야기다. 길을 잃지 않는 안정 속에서도, 가끔은 길을 잃을 용기를 내보자.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낯선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의 풍경, 가끔은 길을 잃고 나만의 길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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