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리유즈에서 배우는 건축의 태도
며칠 전, 뉴욕에서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국내 국립대에 부임한 한 건축가의 강연이 열렸다. 대전예술가의집 3층 강연실.
작은 공간은 건축학도와 실무 건축가들로 가득했고, 스크린에는 뉴욕의 낡은 구조물들이 떠올랐다.
주제는 “Adaptive Reuse as Urban Continuity — From Infrastructure to Identity.” 도시의 연속성으로서의 어댑티브 리유즈(Adaptive Reuse), 즉 기존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건축적 전환에 관한 이야기였다.
건축가는 말했다. “뉴욕에서는 새로 짓는 일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뉴욕은 오래된 도시다. 시간이 여러 겹으로 쌓였고, 거리마다 역사가 스며 있다. 그래서 그곳의 건축가는 제약을 피하지 않는다.
법과 구조, 환경이 주는 조건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제한된 상황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강연은 뉴욕 리유즈의 대표적 사례들로 시작되었다.
하이라인(High Line)은 1980년대 폐선된 고가 화물철도였다. 맨해튼 웨스트사이드를 가로지르던 30피트(약 9m) 높이의 철골 구조물. 녹이 슬고, 잡초가 자라고, 도시가 외면한 흔적이었다.
철거 대신 보존을 선택해야 한다는 제약 속에서, 건축가들은 기존 구조물을 건드리지 않고도 공공 공간을 만들어냈다.
철로는 그대로 두고, 녹슨 레일 사이로 나무를 심었다. 오후의 햇살이 철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고, 사람들은 30피트 높이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신다.
첼시마켓(Chelsea Market) 역시 마찬가지였다. 1890년대 나비스코 과자 공장이었던 이곳은 오레오 쿠키가 처음 만들어진 장소다.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거대한 벽돌 건물과 노출된 배관, 철골 기둥 같은 산업적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감 위에 시장과 레스토랑이 덧입혀졌다. 공장의 뼈대는 새로운 일상의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강연자는 자신이 직접 참여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뉴욕 외곽의 한 지역. 도시는 점점 고밀화되고 있었고, 몇 개 층의 증축이 허용되었다. 단, 저층부를 지역 예술가들과 시민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남겨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건축가는 이 조건을 제약이 아니라 기회로 읽었다. 떨어져 있던 몇 개의 건물 사이에 오픈스페이스를 만들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벽돌의 표면은 그대로 두었고, 오래된 기둥은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낡은 질감과 새 구조물이 맞닿는 지점마다 시간의 결이 묻어났다. 그곳은 오래된 페이지 위에 새 문장을 쓰는 듯한 섬세한 리유즈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완벽하게 정리된 광장도, 화려한 공원도 아니었다. 다만 건물과 건물 사이, 도시가 미처 채우지 못한 틈새에 스며든 여유의 장소였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전시를 보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다.
건축가는 말했다. “도시의 밀도는 어쩌면 틈으로 완성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리고 리유즈 건축의 사례들은 재료와 마감재, 디테일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다. 설계뿐만 아니라 공학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재료의 다양한 실험과 마감재 선택에 집중했다.
리유즈란 낡은 건물을 다시 꾸미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시간의 결을 존중하는 태도에 더 가깝다는 걸, 그날 나는 깊이 실감했다.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새로 짓는 일’에 익숙하다. ‘도시재생’이란 단어가 흔히 쓰이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그 돈이면 새로 짓지”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보존보다 효율이, 기억보다 개발이 앞선다.
이건 단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다. 우리는 아직 ‘남겨둔다’는 행위를 불완전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흔적 대신 완벽한 마감을 택하고, 과거의 질감보다는 반짝이는 신소재를 선호한다. 도시의 역사를 지우고, 백지 위에 새 그림을 그리려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작은 변화들이 보인다. 성수동의 대림창고는 공장 천장의 철골 트러스를 그대로 남겨, 낡은 산업의 뼈대 위에 새로운 일상을 얹었다.
을지로의 철공소들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로 변모하며 도시의 기억을 현재로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도시의 낡은 표면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 이야기를 덧입힌다.
과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연속성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건축은 땅 위에 시간을 쌓는 일이다. 새로운 층을 더하면서도, 그 아래 깔린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일. 그것이 도시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건축은 단순히 구조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설계하는 일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했다. “짓는다는 것은 곧 거주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거주’는 단순히 머무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즉 ‘보살핌(Sorgen)’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본다면, 리유즈(Reuse)란 낡은 구조물과 새로운 쓰임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간을 매개로 한 인간과 도시의 깊은 ‘관계’를 재정립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하이라인의 사람들은 높이 떠 있는 공원을 걸으며 도시를 새로운 각도로 경험한다. 첼시마켓의 방문객들은 과자 공장의 벽돌 벽을 만지며 산업 시대의 흔적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건축은 그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며, 리유즈는 그 관계를 다시 묻는 과정이다.
도시는 지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며 살아 있는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 우리가 그 텍스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도시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건축의 진짜 일은 새로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 아닐까. 그날 강연을 나서며, 나는 그 질문을 오래 품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