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건축에서 발견한 키치 이야기
요즘 여러 글들을 읽다 보면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좋은 이야기인데, 왠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온 우주의 사랑을 가슴에 품는 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성모마리아가 된 것만 같았고..."
"할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랑이란 영원한 별빛처럼 우리 가슴에 영원히 빛나는 것임을..."
"회사를 그만두던 날, 나는 자유라는 거대한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계속 드는 의문이 있었다. 분명 진심어린 경험담일 텐데,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들까? 이 불편함의 정체가 뭘까?
밀란 쿤데라는 이런 현상을 '키치'라고 불렀다.
그는 키치를 "키치란 우리가 배설하는 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이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된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다.
쿤데라가 말하는 키치의 본질은 간단하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고 예쁜 이미지로 포장하는 것. 인간의 추하고 더러운 면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아름답고 숭고한 것만 남기려는 욕망이다.
출산의 고통, 두려움, 지루함을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숭고함'만 남기는 것. 퇴사의 불안과 경제적 고민은 사라지고 '자유'만 남는 것. 그게 바로 키치다.
이런 키치는 글쓰기에서 몇 가지 패턴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감정의 과장이다. "온 우주의 사랑", "천사들의 찬송가" 같은 거창한 수사로 독자를 압도하려 한다. 실제로 느낀 감정보다 훨씬 큰 표현을 빌려와 포장한다.
둘째는 클리셰의 남용이다. 출산하면 성모마리아, 이별하면 단풍잎, 퇴사하면 자유로운 바다. 개인의 독특한 경험을 뻔한 표현으로 일반화시켜버린다.
셋째는 불편한 진실의 삭제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들은 모두 사라지고, 깔끔하게 정리된 하나의 메시지만 남는다.
반면 키치가 아닌 글은 이렇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몰랐다. 슬프긴 한데 동시에 '이제 병원비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이 너무 이상했다."
"회사 마지막 날, 동료들이 '자유의 몸이 되겠네'라고 했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다음 달 카드값을 어떻게 낼지부터 걱정이었다."
이런 글이 더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명확하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슬픔과 안도감,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런 현상은 글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 유로메트로", "파라곤", "포세이돈" 같은 이름을 단 아파트들을 자주 본다. 심지어 "영어도시퀸덤1차아인슈타인타운"이라는 13글자짜리 이름도 있다.
건축 키치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베르사유 궁전을 축소한 웨딩홀, 그리스 신전을 모방한 은행 건물. "프랑스식 아파트"라며 마케팅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기후에 맞춘 평범한 아파트. 기능과 무관한 금색 기둥들이 "고급스러움"을 연출한다고 여겨진다.
글쓰기에서 "온 우주의 사랑"을 빌려오듯, 건축에서는 "유럽의 우아함"을 빌려온다. 본질은 같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빌려온 이미지로 포장하려는 욕망.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건축가 로버트 벤츄리는 《라스베가스의 교훈》에서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복제해놓은 이 공간이야말로 "현대 건축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그의 논리는 이랬다. 고상한 건축가들은 "순수한 건축"을 추구하느라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건 무시한다. 반면 라스베가스는 솔직하다. 사람들이 환상과 스펙터클을 원한다면 그대로 제공한다. 가짜라는 걸 숨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경험을 당당하게 판다.
벤츄리는 이것이 건축가들의 엘리트주의보다 훨씬 정직하다고 봤다. 결국 키치도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하나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곱씹을 만하다.
키치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엘리트주의는 아닐까? 사람들이 원하는 감동과 위로를 주는데, 그게 뭐가 문제일까?
나는 키치를 금지하자는 게 아니다. 유러피안 타운에 사는 분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취향과 여건이 있으니까. 다만 이것만은 질문하고 싶다.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온 우주의 사랑"이라고 쓰고 싶다면 써도 된다. 하지만 "아기 손가락이 내 새끼손가락을 꽉 쥐던 느낌"이라는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안다면, 더 의도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풍 아파트를 선택해도 된다. 승효상의 수졸당처럼 한국적 공간감을 탐구할 수도 있고, 안도 다다오처럼 재료의 본질에 집중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키치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감정으로 정리해주니까.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키치라는 걸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것과, 알고서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나 역시 키치적 표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감동적인 순간을 기록하려다 보면 자꾸 과장하고 싶어지고, 멋진 공간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표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잠깐 멈춰서 묻는다.
이것이 정말 내가 느낀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에 내 이야기를 맞추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문장이 독자를 감동시키려고 과장한 건 아닐까?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건 이 거창한 표현 뒤에 숨은 작고 구체적인 순간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안목을 기르는 과정이다.
안목이란 키치를 완벽하게 피하는 능력이 아니다. 키치가 무엇인지 알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다른 길을 시도해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글쓰기든 건축이든, 창작은 결국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지가 더 많다는 걸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표현은 훨씬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