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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무의식, 혼돈에서 질서로

장순용 교수의 『도시의 정신분석』을 읽고

by Jwook

초콜릿 반죽처럼 끓어오르는 도시, 그리고 우리의 삶

"초콜릿 반죽처럼 끓어오르는 혼돈이 어떻게 질서가 되는가?"

이번 일요일, 고2 딸과 함께 간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장순용 교수의 『도시의 정신분석』 3부작을 펼쳤을 때 마주한 첫 문장이다. 순간, 평소 품고 있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우리는 격자형 아파트 단지에서 살게 되었을까? 왜 지하철역은 전국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양일까? 왜 카페는 점점 더 똑같아지는 걸까?


홍익대 건축학과 장순용 교수는 평소 잘 알고 존경하던 분이다. 솔직히 이전 저서들은 중간에 포기하곤 했다.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책은 달랐다. 정신분석과 철학, 도시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니. 페이지를 넘기며 감탄했고, 동시에 이 어려운 개념들을 우리 같은 일반 독자에게 건네려는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혼돈이 만드는 질서


장순용 교수가 제시하는 관점의 핵심은 이렇다.

세상에는 우리가 결코 직접 볼 수 없는 실재(the Real)가 있다. 초콜릿 반죽처럼, 혹은 지면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잡히지 않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정신, 사회, 도시, 문명은 이 끓어오르는 혼돈이 잠시 표면으로 솟아올라 굳어진 결과물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혼돈이 작은 틈을 통해 분출된다. 그것이 굳으면서 형태를 갖는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질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처음엔 추상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 모든 것이 이렇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 건물도, 아이를 데려다주는 학교도, 주말마다 가는 쇼핑몰도.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힘들이 충돌하고 응고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여기서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eme) 개념이 등장한다.

에피스테메란 각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 쉽게 말해 '시대정신'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방식이 시대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 시대의 지식과 제도, 그리고 공간을 만들어낸다.

푸코가 분석한 병원, 학교, 감옥을 떠올려보자. 왜 이것들이 모두 복도 양쪽에 방들이 일렬로 늘어선 비슷한 구조를 가졌을까? 우연이 아니다. 이는 '감시', '규율', '효율'을 중시하는 근대의 에피스테메가 공간으로 구현된 결과다. 시대정신이 벽돌과 콘크리트로 굳어진 것이다.


장순용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 명의 철학자를 통해 이 '혼돈이 질서로 응고되는 과정'을 더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


1. 라캉: 무의식이 설계한 도시

자크 라캉에게 중요한 건 무의식적 실재(Real)가 끓어오르다가 상징적 질서로 응고되는 과정이다. 라캉은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해지는" 존재라고. 우리도 모르는 무의식적 욕망이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판옵티콘형 감옥을 보자.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수감자를 볼 수 있지만, 수감자는 자신이 언제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다. 이게 단순히 효율적인 감옥 설계일까? 아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감옥 설계도 —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감방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원형 구조. 출처: 생성형 AI, Gemini

이는 근대 사회의 무의식적 욕망이 건축으로 응고된 것이다. 통제하고 싶다. 감시하고 싶다. 규율을 내면화시키고 싶다. 이런 욕망들이 원형 감시탑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생긴 동들, 번호로 구분되는 호수, 관리사무소에서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구조. 이 모든 것이 '관리 가능성', '예측 가능성', '평등한 감시'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산물이다.


2. 들뢰즈: 흐르고 퍼지는 도시

질 들뢰즈는 고정된 존재보다는 끊임없는 생성과 흐름에 주목한다. 그의 리좀(rhizome) 개념을 보자. 나무는 중심 뿌리에서 위로 뻗어나가지만, 리좀은 땅속에서 수평으로 연결되고 확산되는 덩굴줄기다. 들뢰즈에게 도시는 나무가 아니라 리좀이다.

나무(Tree)와 리좀(Rhizome)의 비교 , 위계적 구조와 비위계적 연결망을 대비. 출처: Deleuze & Guattari, A Thousand Plateaus(1980)

홍대 골목길이 딱 그렇다. 처음엔 작은 카페 하나가 생긴다. 그 옆에 작은 옷가게가 들어선다. 그 옆에 갤러리가 생긴다. 누가 마스터플랜을 짠 것도 아닌데 어느새 하나의 문화 지구가 형성된다.


중심도 없고 위계도 없다. 그저 수평적으로 연결되고 확산될 뿐이다. 들뢰즈의 표현으로 하자면, 잠재태(virtual)가 현실태(actual)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도시 공간을 만들어간다. 계획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그저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


요즘 뜨는 '핫플레이스'들을 보면 이해가 쉽다. 성수동, 을지로, 익선동. 누가 만든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모여들고, 가게들이 생기고, 문화가 형성된다. 탑다운(top-down)이 아니라 보텀업(bottom-up)으로 만들어지는 도시.


3. 바디우: 사건이 뒤흔드는 도시

알랭 바디우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événement)이 기존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진리를 출현시킨다고 본다. 그리고 주체는 그 사건에 충실성(fidelity)을 보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


광화문 광장을 떠올려보자. 2008년 촛불집회 이전과 이후, 이 공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전까지 광화문은 그저 세종대왕 동상이 있고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였다. 하지만 사건 이후, 이 공간은 재정의되었다. 시민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광장.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장. 물리적으로는 같은 장소지만, 사건 하나가 그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전경, 출처: 한겨레, “광화문광장 대규모 집회 항공 사진”

이는 도시 전체에도 적용된다. 대지진, 전쟁, 팬데믹 같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이 도시를 완전히 재구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간다.


세 철학자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같은 진실을 향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도시 공간은 사실 무의식적 욕망(라캉), 수평적 확산(들뢰즈), 예기치 않은 사건(바디우)이 만들어낸 일시적 질서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질서는 시대정신, 즉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사실은 물렁물렁하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가 "이건 원래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특정 시점에서 혼돈이 응고되어 만들어진 일시적인 질서에 불과하다는 것. 영원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잠시 굳어있을 뿐인 마그마 같은 것이라는 것.

주5일 근무제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20대에게 "예전엔 토요일에도 회사 갔어"라고 하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토요일 출근은 당연했다. IMF 이전에는 주6일 근무가 표준이었다. "주말은 원래 쉬는 날"이라는 생각 자체가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질서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날씨와 계절에 따라 일했지, 정해진 요일에 따라 일하지 않았다.


핵가족 제도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로만 구성된 가족이 '정상'이라는 생각은 불과 50-60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 전까지는 3대,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당연했다.


학벌 사회는 어떤가. 서울대 나와야 성공한다는 믿음도 사실은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특정한 질서다. 그 전에는 과거 시험이 있었고, 그 전에는 신분이 있었다. 미래에는 또 다른 기준이 생길 것이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도 그렇다. 1970년대 이전 한국인들은 대부분 단독주택에 살았다. 아파트는 극소수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70%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불과 50년 만에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원래 그런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특정 시기에 혼돈이 응고되어 만들어진 일시적 질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팬데믹은 어떨까. 2020년 1월까지만 해도 재택근무는 '특별한 복지'였다. 온라인 수업은 '보조 수단'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걸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2월, 갑작스러운 사건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3월이 되자 전 국민이 마스크를 썼다. 4월에는 학교가 문을 닫았다. 5월에는 회사 절반이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던 우리의 상식이 두세 달 만에 무너졌다. 줌 미팅이 폭발했다. 배달 앱 주문이 300%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이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2022년이 되자 이 모든 것이 다시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혼돈이 분출되고, 사건이 그것을 터뜨리고, 새로운 질서가 응고되는 과정. 바로 우리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난 일이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다


이런 관점을 갖게 되면 평소에 그냥 지나치던 공간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출근길에 타는 9호선 지하철역을 보자. 왜 모든 역이 똑같이 생겼을까? 밝은 조명, 스크린도어, 안내 표지판, 대기 줄 표시. 이건 단순히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다.


'표준화', '대량 수송', '시간 엄수', '안전 관리'라는 근대적 가치가 공간으로 응고된 것이다. 우리 모두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이동시키려는 시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공간. 역무원은 최소화되고, 자동 개찰구가 사람을 선별하고, CCTV가 모든 것을 감시한다. 판옵티콘의 21세기 버전이다.


매일 지나치는 아파트 단지는 어떨까. 32평형, 84㎡. 방 3개, 화장실 2개. 거실-주방-안방 구조. 전국 어디를 가도 똑같다. 왜 이렇게 표준화되었을까? 이건 '효율적 관리', '평등한 배치', '감시 가능성', '교환 가능성'이라는 욕망이 만들어낸 형태다.


모든 집이 비슷하고, 모든 동선이 예측 가능하고, 모든 주민이 관리되고, 언제든지 다른 집과 교환할 수 있는 공간. 개성도 없고 특색도 없지만, 그게 바로 의도된 것이다. 표준화 자체가 근대의 욕망이었으니까.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도시 전경, 출처: Unsplash, “High-rise apartment buildings in South Korea”

요즘 어디를 가도 비슷해 보이는 카페들을 보자. 밝은 조명, 화이트&우드 톤 인테리어, 심플한 로고, 테이크아웃 컵. 성수동이든 연남동이든 제주도든 똑같다. 이건 '인스타그래머블', '빠른 회전율', '프랜차이즈화', '비대면 주문'이라는 현대적 욕망이 만들어낸 정크 스페이스다.


공간의 개성보다 사진발이 중요하고, 오래 머무르는 것보다 빨리 나가는 게 중요하고, 직접 주문하는 것보다 키오스크가 중요한 시대의 산물.


이렇게 보면 도시는 단순히 건물의 집합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무의식, 욕망, 가치, 두려움이 새겨진 거대한 텍스트다. 우리는 매일 그 텍스트를 읽으며 살아간다. 대부분은 읽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어떤 실질적 도움이 될까? 가장 큰 변화는 변화 자체를 대하는 태도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했다.


"이렇게 살아왔는데 왜 바꿔야 해?" "원래 그런 거잖아." 변화는 불편하고, 위험하고, 피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 '원래'라는 게 사실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었던 땅이 사실은 잠시 굳어있을 뿐인 마그마라는 것을.


그러면 변화가 덜 무섭다. 아니, 어쩌면 흥미롭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혼돈이 끓어오르고 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저출산, 고령화, 메가시티. 이런 것들이 만들어낼 균열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이 균열 속에서 어떤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을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실제로는 바뀔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내가 그 변화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내가 그 변화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궁금하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보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일자리를 빼앗기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 관점으로 보면 다르게 보인다. '일자리'라는 개념 자체가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특정한 질서다. 그 전에는 '일'은 있었지만 '일자리'는 없었다.


재택근무도 그렇다. "회사에 안 나가면 어떻게 일을 하냐"던 사람들이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꼭 사무실에 앉아있지 않아도 일은 된다는 것을. 그렇다면 '사무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재정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이 가능해진다.


변화가 오는 그 순간을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것. 혼돈을 혼란이 아니라 창조의 재료로 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딸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오는 길, 딸에게 물었다.

"너희 학교 건물은 왜 저렇게 생겼을까?"

고2 딸은 창문 너머 학교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답했다.

"효율적으로 많은 학생을 관리하려고?"


정확했다. 복도 양쪽으로 일렬로 늘어선 교실들, 중앙의 감시 가능한 계단, 똑같이 나뉜 공간들,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구조. 이건 단순히 '효율적인 설계'가 아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규율'을 내면화시키려는 근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바로 푸코가 말한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산물이다.


"그럼 미래의 학교는 어떻게 생겼을 것 같아?"

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학교 건물 자체가 필요 없을지도? 메타버스에서 수업하고."


그 순간, 느꼈다. 딸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지금의 질서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가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럼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없어질까?"

"없어지진 않을 것 같은데...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


17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이 아이는 이미 혼돈과 질서의 관계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도시 현상을 철학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때로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 때문이고, 기술적 제약 때문이고, 그냥 우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 '효율'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효율적이라고 보는지, 무엇을 제약으로 받아들이는지, 그 자체가 이미 시대정신의 반영이 아닐까?


산업혁명 시대에는 '대량 생산'이 효율이었다. 정보화 시대에는 '빠른 속도'가 효율이었다. 지금은 '개인화'가 효율이 되어가고 있다. 효율의 기준 자체가 시대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기술적 제약이나 경제적 효율도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일요일 오후의 선물


정신분석과 도시 철학을 이렇게 엮을 수 있다는 것. 혼돈에서 질서로, 무의식에서 건축으로, 사건에서 문명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흐름을 읽다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이 얼마나 깊은 층위의 사유 위에 세워져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는다. 그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도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혼돈이 다음 질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라캉이 본 무의식의 분출, 들뢰즈가 본 수평적 확산, 바디우가 본 예측 불가능한 사건.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서울 어딘가에서, 한국 어딘가에서, 세계 어딘가에서. 그리고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다. 단지 응고된 질서 위를 걷는 사람이 아니라, 혼돈이 응고되는 그 순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월요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생각할 것이다. 이 공간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이 질서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다음에는 어떻게 바뀔까? 회사 건물 앞에 서서 생각할 것이다. 이 '출근'이라는 행위 자체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10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출근할까?


저녁에 집에 돌아와 딸과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할 것이다. 이 '가족 식사'라는 의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50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모여 밥을 먹을까? 이런 질문들이 이제는 불안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호기심을 만든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끔은 이런 우연한 만남이 있다.


특별한 기대 없이 집어 든 책 한 권이 세상을 보는 렌즈를 바꿔놓는 순간. 고2 딸과 함께하는 일요일 도서관 나들이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아이와 함께 변화하는 세상을 목격하고, 함께 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또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어떤 책이 어떤 질문을 던질까. 어떤 대화가 딸과 나 사이에 오갈까. 그 기대감을 안고 도서관 문을 나선다. 바깥은 10월의 선선한 저녁 공기다. 도서관 건물을 뒤돌아본다. 이 건물도, 이 공간도, 언젠가는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혀 슬픈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혼돈은 끊임없이 끓어오르고,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함께 만들어간다.

도서관에서 읽은 장순용 교수의 '라캉, 들뢰즈, 바디유와 함께하는 도시의 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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