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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pace and Time

시간은 기억의 온도다

흐르는 시간과 남아 있는 마음의 잔열

by Jwook

오래된 사진 한 장, 그리고 시간의 역설


오래된 폴더 속에서 예전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안의 나는 웃고 있었고, 그때의 공기는 아직 따뜻했다. 스크린 너머로 그 시절의 바람과 냄새가 손끝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온도는 지금의 공기와는 달랐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쉼 없이 흘러왔지만, 그 사진 속 감정의 온도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그때 깨달았다.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감정들은 끝내 식지 않는다. 그것들은 숯불의 잔불처럼, 오래된 열기로 남아 불현듯 우리의 손끝을 데운다.


시간은 만능 해결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기억시키는 감정의 온도계다.


초침과 마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계의 초침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그리스어로 그것은 크로노스(Chronos), 즉 물리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는 초침처럼 공평하지 않다. 기다림의 10분은 길게 늘어지고, 행복했던 밤은 한순간에 지나간다. 그건 카이로스(Kairos), 의미와 감정이 응축된 주관적 시간이다.


우리는 시간을 숫자로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밀도와 온도로 느낀다. 뜨거운 시간은 오래 남고, 차가운 시간은 쉽게 잊힌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0분을 평생 기억하고, 어떤 하루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기억의 잔열 — 따뜻함이 아픔이 되는 순간


기억은 언제나 감정의 체온을 입고 되살아난다. 슬펐던 기억은 여전히 차갑고, 행복했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을 데운다. 우리가 과거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장면이 아니라 그때의 잔열 때문이다. 그 잔열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살아왔다는 증거이자, 지금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따뜻한 기억일수록 아프다. 그 완전했던 온기가 지금의 불완전함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안고 산다 — 그리움과 후회, 감사의 온도와 상실의 냉기. 우리는 잔열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그 불빛에 너무 오래 머물면 현재의 시간은 점점 식어버린다.


속도에 삼켜진 오늘


우리는 '시간 관리'에는 능숙하지만, '시간을 느끼는 법'은 잊어버렸다. 회의는 정시에 시작하지만 마음은 늘 늦는다. 일정표는 가득하지만 하루는 공허하다. 카페의 커피는 뜨겁지만, 대화는 식어간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우리는 그 속도를 따라잡느라 정작 나 자신의 속도와 온도를 잃는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시계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울릴 때마다 반응해야 하는 알람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마음의 체온은 낮아진다. 시간은 효율로 계산되지만, 감정은 그 어떤 효율로도 환산되지 않는다.


회복의 가능성 — 잃어버린 온도를 되찾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거창하지 않다. 의도적인 멈춤, 그 짧은 틈에서 시간의 온도는 다시 살아난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10분, 목적 없이 걷는 30분, 오래된 노래 한 곡에 머무는 5분. 그 '비효율적인 시간'이야말로 감정의 체온을 회복시키는 공간이다.


가끔 아주 우연히 멈춰서는 순간이 있다. 길가의 음악, 낡은 카페의 냄새, 누군가의 목소리 한 줄. 그때 잊혔던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 그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던 시간의 잔열이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기억은 식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건 그 따뜻함을 완전히 잃지 않고 견디는 일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우리를 통과해 지나간다. 그래서 결국 변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지나온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삶의 시간을 잃었다고 느끼는 건, 사실 그때의 온도를 잃은 것이 아닐까. 그 온도는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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