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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enses of Time

그 시절, 선생님이 허공에 쌓아 올리던 것들

언제부터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을까

by Jwook

중학교 음악실에서 졸던 내가, 지금은 차 안에서 브람스가 흘러나오면 시동을 끌 수 없다.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베토벤의 그 음악이, 당시엔 점심시간 축구 시합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지휘봉 대신 분필을 든 채 허공을 향해 손짓하셨고, 미간을 좁히고 입을 굳게 다문 그 표정은 어린 나에게 다소 기이했다. 나는 그저 교과서 여백에 낙서를 하며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하는 건조한 의문만을 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삶의 아이러니를 겪지 않았고, 상실이 주는 침묵을 알지 못했다. 음악이 품고 있는 거대한 구조를 감각할 마음의 그릇이 아직 빚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세월이 흘러 나 역시 그때의 선생님만 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질문은 전혀 다른 무게로 되돌아왔다. 왜 같은 악보, 같은 연주임에도 나이에 따라 음악은 이토록 다르게 들리는가?


음악은 그 자리에, 나는 흐르는 곳에


고백하자면 나는 클래식을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다. 작곡가의 생애를 줄줄 외우지도, 음악학적으로 왜 이 연주가 훌륭한지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알게되었다. 같은 곡이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가 음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무게에서 온다는 것을.


10대의 내가 베토벤에게서 들은 것은 단순히 "웅장하다"는 물리적 음향뿐이었다. 소리는 고막을 때리고 흩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20대의 열병과 실패, 30대의 치열한 성취와 좌절, 40대를 넘어 삶의 하중을 견디는 시기를 지나자, 흘려들었던 멜로디가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엔 단지 음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의 서사가 되고, 나아가 내 삶을 지탱하는 구조물처럼 느껴진다. 베토벤의 격정은 소음이 아니라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처절한 축조 과정으로 보이고, 쇼팽의 야상곡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고독한 밤의 독백으로 들린다.


음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변하는 것은 그 음악을 받아들이는 내가 변한 것이다.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듣는 이의 몫


대중음악, 특히 가사가 있는 음악은 친절한 가이드와 같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사랑보다 깊은 상처"라며 감정의 목적지를 언어로 명확히 지시한다. 그래서 즉각적이고 선명하다.


하지만 클래식은 다르다. 클래식은 감정을 정의하지 않고 구조만을 제시한다. 작곡가는 악보 위에 기둥과 지붕을 세우지만, 그 사이의 벽을 채우고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온전히 듣는 이의 몫이다. 언어가 제거된 그 막막한 여백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이끈다. 그렇기에 같은 곡이라도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향곡보다 협주곡에 더 끌린다. 젊었을 때는 웅장한 교향곡의 스케일에 압도되었다면, 이제는 한 사람의 목소리와 집단의 응답이 만드는 긴장과 균형에 더 귀가 간다. 솔로와 오케스트라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그 미묘한 관계. 이것은 어쩌면 나이 들며 깨닫게 된 삶의 지혜와 닮아 있다.


피아노 협주곡도 좋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활이 현을 문지르는 내내 연주자의 몸이 소리와 함께 떨린다. 그 떨림이 보인다. 가느다란 선 하나로 공간을 가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같은, 그 날카로운 취약함.


정확함 속의 깊이


최근 힐러리 한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실황을 다시 접하며, 이러한 생각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안네 소피 무터의 열정적 해석도, 자닌 얀센의 서정적 표현도 훌륭하지만, 내게는 힐러리 한이 가장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그 이유는 '정확함'이었다.

힐러리 한의 활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1악장의 격정 속에도, 2악장의 서정 속에도, 음 하나하나는 제 자리에 제 무게로 놓인다. 이것은 차가운 기계적 정확함이 아니라, 구조를 완벽히 이해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확함이다.

힐러리 한 &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특히 1악장 카덴차에서 오케스트라가 멈추고 바이올린만 남았을 때, 그녀는 폭발할 법한 그 순간에 극한의 절제를 택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활은 가늘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긴장을 유지하며 허공을 갔다.


카덴차가 끝나고 1악장이 클라이막스로 달려갈 때, 나를 뭉클하게 한 것은 오케스트라가 폭발하듯 연주하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 직전, 플루트가 나지막이 주제를 부르며 바이올린과 대화하는 짧은 순간이었다. 내 안 어딘가에 있던 감정이 울컥 넘어왔다. 젊었다면 클라이막스의 폭발에 전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두 악기가 조용히 주고받는 그 순간에 더 깊이 흔들렸다.


2악장 칸초네타에서는 바이올린이 고백하듯 나지막이 흐르고, 3악장에서는 러시아 민속춤의 리듬이 폭발하지만 결코 통제를 잃지 않았다. 바이올린이 주선율을 열면 목관은 얇은 빛처럼 스며들고, 현악 파트는 단단한 대지처럼 바닥을 지지했다. 솔리스트는 오케스트라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오케스트라 역시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내 성향과 맞는 음악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은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배치하는 것. 열정은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구조 안에서 긴장시키는 것. 나이 들어 깨닫게 된 이 원칙이, 힐러리 한의 활 안에 그대로 있었다.


듣는 음악에서 겪는 음악으로


며칠 전, 차를 몰고 가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을 들었다.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현악의 물결이 천천히 밀려오는 그 순간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20대의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그 선율이, 지금의 내게는 지난 세월의 무게 전부를 품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야 나는 어릴 적 음악 선생님의 표정을 이해한다. 선생님은 단순히 베토벤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라는 거푸집에 자신의 삶을 부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힐러리 한의 연주에서 위안을 느끼는 것은, 그녀의 활이 내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정확히 소리로 번역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방식을 닮은 음악에 끌린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 음악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같은 곡이라도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기에, 음악은 매번 다르게 우리를 맞이한다.


음악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그 음악을 받아들이는 내 삶의 그릇이다. 그래서 음악은 언제나 새롭고, 그 새로움 속에서 삶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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